경남 통영에 있는 120만㎡ 규모의 HSG성동조선 야드./HSG성동조선

삼성중공업이 국내 중견 조선소인 HSG성동조선에 유조선 2척 건조를 통째로 맡기는 계약을 14일 체결한다. 국내 조선사가 계열사가 아닌 국내 조선사에 선박 건조를 전부 맡기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조선업 호황으로 도크가 포화 상태인 삼성중공업과 과거 유조선 건조 경험을 갖춘 HSG성동조선 간의 협업 모델이 본격화하는 것이다. 삼성중공업은 이후 추가로 HSG성동조선에 2척의 건조를 맡길 예정이다.

13일 조선업계에 따르면 이왕근 삼성중공업 조선소장(부사장)과 김현기 HSG성동조선 대표는 14일 오전 경남 거제 삼성호텔에서 만나 삼성중공업이 그리스 선사로부터 수주한 수에즈맥스(S-MAX)급 유조선 건조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다. S-MAX급은 수에즈운하를 통과할 수 있는 최대 크기의 유조선이다.

삼성중공업 품질·공정 인력 수십 명은 이미 통영 야드에 상주하며 협업을 진행 중이다. 전선(全船) 위탁 준비에 따라 파견 규모도 확대되고 있다. 두 회사는 앞으로 1년여 동안 상세 설계와 주요 기자재 발주, 공정 시뮬레이션 등 핵심 준비 과정을 거쳐, 내년 12월 배 건조의 첫 공정인 '강재 절단(철판 절단)'에 들어간다. 이는 HSG성동조선이 8년여 만에 선박 신조(新造)를 전선 단위로 재개하는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 삼성重, '옛 유조선 명가' 성동 택해… 통선박 건조 경험 주효

삼성중공업이 이례적으로 국내 중견 조선사에 유조선 전체 건조를 맡긴 건 선박 건조 주문이 밀려들고 있어서다. 올 상반기 삼성중공업의 국내 유일 조선소인 거제조선소의 도크 가동률은 116%로 이미 3년 치 이상 일감을 확보한 상태다. 이에 최근 들어 삼성중공업은 수익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등 고부가 선종을 거제 도크에 우선 배정하고, 유조선은 위탁으로 돌려 도크 효율을 극대화하는 '생산 유연화' 전략을 택하고 있다.

그동안 이 전략의 주요 파트너는 인건비가 저렴한 중국 조선소였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국내 중견 조선소가 전선 단위 위탁 대상이 됐다. 단순한 단가 경쟁력만 보면 중국이 유리하지만, 품질 관리와 장기적 협업 안정성 등의 측면에서는 국내 조선소가 더 적합하다는 게 업계의 평가다.

업계 한 관계자는 "전선 단위 위탁은 한 번으로 끝나는 계약이 아니라 수년간 이어지는 구조라, 지리적으로 가깝고 공정 관리가 용이한 국내 조선소가 장기적으로 안정적"이라며 "국내 조선 생태계가 약해진 상황에서 삼성중공업이 국내 중견사를 택한 건 장기적으로 조선 밸류체인을 유지하는 데에도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삼성중공업이 첫 국내 파트너로 HSG성동조선을 택한 데에는 건조 이력과 대형 설비가 차별점으로 작용했다. HSG성동조선은 옛 성동조선해양(이하 성동) 시절 유조선을 주력으로 건조하며 2007년 세계 8위까지 올랐던 조선소다. 이번에 맡게 될 S-MAX급 유조선 역시 성동이 과거 강점을 보였던 선종이다.

성동은 2018년 조선업 불황으로 법정관리를 거치는 등 부침을 겪었지만, 핵심 자산은 그대로 유지돼 있다. 경남 통영의 120만㎡(약36만평) 대형 야드와 골리앗 크레인 등 육상 건조 설비는 여전히 정상 가동이 가능하다.

성동은 대형 블록을 야드에서 미리 조립해 탑재 횟수를 줄이는 방식으로 건조 기간을 단축할 수 있어, 다른 중견 조선소와 차별화된 경쟁력으로 꼽힌다. 최근 수년간 삼성중공업이 HSG성동조선에 블록·반선 물량을 맡기며 손발을 맞춰 온 협업 경험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성동은 2020년 HSG중공업에 인수된 뒤 해상풍력 하부구조물 사업을 중심으로 재기를 모색해 왔다. 1989년 설립된 HSG중공업은 1990년 삼성중공업 사내업체로 입주해 사업을 시작한 삼성중공업의 오랜 파트너다. HSG중공업은 이번 계약을 계기로 선박 신조 분야를 다시 확대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 품질·납기 관리가 관건… 韓 조선업계 선박 위탁 모델 출발점

위탁생산이지만 최종적으로는 '삼성중공업' 브랜드를 달고 선주에게 인도되는 배이기 때문에 품질 관리가 이번 협력의 핵심 변수다. 삼성중공업이 공정·품질 담당 인력을 수십 명 팀 단위로 파견해 통영 야드에 상주시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검사, 용접 품질, 공정별 검수 등 주요 관리 포인트는 삼성중공업이 직접 챙긴다.

업계 관계자는 "이번 프로젝트는 선주 측 승인 아래 진행되는 만큼, 주요 품질 점검과 납기 일정은 삼성중공업이 수시로 관리·지원하는 형태로 운영될 것"이라며 "HSG성동조선도 과거 전선 건조 경험이 있고, 두 조선소가 거제와 통영에 인접해 있어 협업이 원활하다는 점이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선업계에서는 이번 사례가 '국내형 전선 위탁' 모델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대형 조선사들의 도크 포화가 당분간 해소되기 어렵고 국내 중견 조선소들도 일정 규모의 신조 역량을 다시 확보하고 있어, 전선 단위 물량이 해외가 아닌 국내로 향하는 흐름이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