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Asia Pacific Economic Cooperation) 2025 정상회의가 개막을 앞둔 가운데, APEC이 '아시아 및 태평양 지역의 경제성장과 번영을 목표로 하는 협의체'라는 본연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역 내 관세 인하와 시장 개방 등 전통적인 경제 협력의 틀에서 벗어나, ▲공급망 확보 ▲전략 산업 보호 ▲동맹 강화 등 경제안보 중심의 협력 체계로 재편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31일 열리는 2025 경주 APEC 정상회의 본회의에는 국빈 방문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비롯해 21개 회원국의 국가 정상과 대리인이 참석한다. 전 세계의 시선은 30일 열리는 미·중 정상회담에 쏠린다. 양국의 무역 협상 타결 여부에 따라 글로벌 경제가 요동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역 내 다자 협력이 약화되고 국가 간 회담의 중요성이 커지며 APEC이 외교 무대화되는 모습이다.
로이터 등 외신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가 올해 부과한 광범위한 관세는 APEC 회원국 절반 이상에 적용됐다. APEC은 21개 회원국의 수출량이 올해 0.4% 증가하는 데 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난해 증가량은 5.7%였다. APEC이 출범한 1989년 당시 평균 17%였던 회원국 관세율이 2021년 5.3%까지 떨어지고 같은 기간 무역 규모는 9배 늘어난 것과 대비된다.
자유무역 기반의 다자 간 협력이라는 APEC 본연의 취지가 약화된 배경으로는 지난해 말부터 전 세계에서 강화되고 있는 보호무역주의 기조가 꼽힌다. 트럼프 대통령은 작년 말 당선 이후 미국의 무역 적자 해소와 제조업 살리기에 나섰다. 한 APEC 정책 지원 담당자는 "보호무역주의 움직임과 보조금 같은 불공정 무역 관행이 늘어나며 기업들이 결정을 보류하고 국경 간 활동을 억제하는 환경이 조성됐다"고 했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FTAAP(Free Trade Area of the Asia Pacific·아시아·태평양 자유무역지대)를 준비하기 위해 관련 용역을 줬으나, 트럼프 대통령 당선 후 보호무역주의 기조가 심화되며 진행이 중단된 것으로 전해졌다. FTAAP는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전체의 자유무역협정(FTA)으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대선에서 패배한 후 열린 2020년 APEC에서 언급된 바 있다.
개방 및 자유무역과 거리가 먼 상황에서 열리는 이번 APEC에서는 공동 선언문 작성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다. 조현 외교부 장관은 지난 28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종합감사에서 "APEC 정상회의 공동 선언문에 자유무역을 지지하는 문구를 넣는 것을 두고도 국가 간 이견이 있다"고 했다.
김태황 명지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트럼프 행정부 정책의 핵심인 보호주의(Protectionism)는 '자유(free)와 개방(open)'이라는 APEC의 주요 가치와 배치된다"면서 "APEC의 선언문(declaration)은 구속력이 없긴 하지만, 다자간 협력이라는 형식적인 선언조차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 1기 시절인 2018년과 2019년에 치러진 APEC에서도 공동선언문 채택이 불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