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력을 필두로 하는 팀코리아(한국전력·한국수력원자력)가 사우디아라비아 원전 수주에 공들이고 있는 가운데 미국이 한국에 사우디 원전 수출 시 미국식 원전 모델을 채택하도록 압박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팀코리아는 지난 1월 미국 웨스팅하우스와 '글로벌 합의문'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팀코리아의 사우디 원전 수주 활동은 보장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미국으로부터 미국식 모델 채택 압박을 받게 되자, 정부는 수용 여부를 놓고 고심하고 있다.
15일 정부와 에너지 업계 등에 따르면 지난 8월 말 열린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에너지 장관 회담 참석차 방한한 제임스 댄리 미국 에너지부 차관은 한국 정부 및 한전 고위급 관계자를 만나 사우디 원전 입찰 때 '한국형 모델' APR1400이 아닌 웨스팅하우스 모델인 AP1000을 채택해 웨스팅하우스와 공동 수주하도록 요구했다.
이와 관련해 서왕진 조국혁신당 의원은 지난 13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에서 열린 산업통상부 국정감사에서 김정관 산업부 장관에게 "한전이 오는 11월 사우디 원전 입찰에 참여하는데, 미국 정부가 웨스팅하우스의 대형 원전(AP1000) 모델로 노형을 변경하고 한전과 웨스팅하우스가 공동 수주하도록 요구했다는 제보가 있다"고 질의했다.
이에 김 장관은 "현재 사우디 프로젝트와 관련해 다양한 협의가 진행 중이다. (한전의 모델인) APR1400을 포함한 여러 수출 옵션이 검토되고 있다"며 "APR1400도 미국의 기술 허가 없이는 수출이 어려운 구조임을 인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서 의원은 "이는 명백한 부당 간섭"이라고 지적했다.
지난 1월 당시 팀코리아와 웨스팅하우스가 체결한 합의문에 따르면 한국은 원전을 수출할 때 웨스팅하우스와 1기당 6억5000만달러(한화 약 9300억원) 규모의 물품·용역 구매 계약을 맺고, 1기당 1억7500만달러(약 2500억원)의 기술 사용료를 내기로 했다. 여기에 미국이 AP1000 프로젝트 공동 추진까지 제안한 건 한국으로부터 얻는 경제적 이득뿐 아니라 향후 원전 생태계의 주도권까지 놓지 않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이미 APR1400 모델로 원전 수출 공급망을 구축해둔 상태다. 첫 수출인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 프로젝트에 이어 올해 6월 계약한 체코 신규 원전 2기도 APR1400으로 공급할 예정이다. 때문에 APR1400이 아닌 AP1000 모델로 추진할 시 새로 공급망을 구축해야 하는 만큼 공사 기간도 길어질 뿐 아니라 건설 비용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
미국이 한국의 원전 수주에 미국식 모델을 쓰도록 압박하는 건 원전 설계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설계·조달·시공(EPC)에 강점을 가진 한국의 능력을 이용하겠다는 심산이다. 미국은 원전 설계 등 원천 기술 강국이지만 1979년 스리마일섬 원전 사고 이후 신규 원전 건설 인허가가 장기간 중단돼 사실상 원전 공급망이 붕괴하면서 건설 능력을 상실했다.
때문에 한국이 사우디에서 AP1000 건설을 추진해 관련 공급망을 새로 구축하면 추후 미국 내 원전 건설 때도 이를 활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미국의 사업 경제성이 높아질 것으로 본다는 게 업계의 주된 시각이다. 더구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오는 2050년까지 현재 약 100GW(기가와트)인 미국 내 원전 설비용량을 400GW로 확대하겠다는 장기 목표도 내걸었다.
결국 한국 입장에서는 사우디 원전 사업을 수주하더라도 미국의 원자력 수출 통제에 따라야 하는 현실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한 원전 업계 고위 관계자는 "미국 중심의 국제 원자력 통제 체제 속에서 한국이 (미국의) 제안을 무시하고 독자 수출에 나서는 건 사실상 어렵다"며 "정부도 수용 여부를 고심하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