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화학 산업은 인공지능(AI)을 비롯해 전기차, 그래픽처리장치(GPU) 등 다양한 첨단산업에 필요한 기반까지 제공한다. 따라서 정부의 산업 정책은 성장을 지원하는 데 그치지 말고, 산업이 쇠퇴하거나 구조가 바뀔 때의 충격까지 함께 관리해야 한다."

네이선 레인(Nathan Lane) 영국 옥스퍼드대 경제학 교수는 최근 인터뷰에서 석유화학 같은 기간산업을 관리하는 정부 책임에 대해 이렇게 강조했다. 레인 교수는 지난 5월 한국의 중화학공업 정책을 분석한 논문을 세계적 경제 학술지 'QJE(Quarterly Journal of Economics)'에 싣는 등 한국 산업 정책과 동아시아 경제 발전 전문가로 통한다. 8월 20일 한국 정부가 석유화학 기업에 나프타분해시설(NCC) 설비 규모 25% 감축을 요구한 것에 대해 그는 "정부가 과감하게 결단하고, 더 큰 전략을 그리려는 모습을 보인 점은 고무적"이라면서도 "정부의 정책적 유인이 실제 기업의 구조조정과 통합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게 관건"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네이선 레인 - 영국 옥스퍼드대 경제학 교수, 매사추세츠대 경제학, 컬럼비아대 계량분석 석사, 스톡홀름대 경제학 박사, 현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방문교수 / 사진 네이선 레인

1970년대 한국은 다른 개발도상국보다 빠르게 중공업화를 이뤘다. 무엇이 이를 가능하게 했는가.

"세 가지 요인 덕분이다. 첫째, 1960년대 경공업 수출을 통해 축적한 경험을 석유화학과 철강 같은 중화학공업에 적용하며 새로운 경쟁 우위를 만들어냈다.

둘째, 당시 정부는 정책을 세밀하게 짜고 목표 산업을 현실적으로 정했다. 해외 사례를 참고하고 현장의 엔지니어와 기업과도 긴밀히 협의했다. 이는 유능한 경제 관료를 꾸준히 길러낸 결과였다.

셋째, 정부 스스로 행정 역량을 키웠다. 단기적인 정책을 선택하는 대신 유능한 관료를 길러내고 정책을 집행할 조직 능력을 강화했다. 덕분에 한국은 기술·정치적 제약 속에서도 실행 가능한 정책을 만들 수 있었다. 1970년대 산업 전략이 완벽하지는 않았어도, 그 성과는 대단했던 이유다."

이러한 놀라운 성과에도 최근 한국의 석유화학 산업이 위기에 처한 배경은.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이후 세 가지 충격이 닥친 결과다. 첫째, 석유화학 제품 수요가 예상만큼 회복되지 않았다. 둘째, 중국이 석유화학을 전략산업으로 지정하고 보조금을 투입해 자국 기업을 키우며 경쟁 우위를 확보했다. 셋째,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같은 지정학적 충격으로 한국의 나프타·원유 공급망이 흔들렸고, 러시아산 물량을 중국이 흡수하면서 한국에 시장 환경이 더 불리해졌다."

석유화학 같은 기간산업이 흔들릴 때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유럽에선 석유화학을 포함한 화학 산업을 '산업의 산업(industry of industries)'이라고 부른다. 제조업뿐 아니라 반도체, 전자, 자동차 같은 핵심 산업과 연결돼 있어서다. 가령 지난 8월 웨이퍼 필수 소재인 삼불화질소(NF₃)를 생산하는 일본 칸토덴카공업 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 충격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TSMC, 삼성전자, 마이크론, 소니 등 주요 기업과 일본 정부가 긴급 대응에 나서야 했다. 즉, 석유화학 같은 기간산업이 흔들리면 다른 산업도 연쇄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최근 한국 정부는 석유화학 산업구조 개편을 위해 기업에 NCC 설비 규모를 25% 감축하라고 지시했다. 어떻게 평가하나.

"한국 정부가 정치·경제적으로 신속하고 포괄적인 대응 의지를 보였다고 본다. 이재명 대통령과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구윤철 경제부총리 모두 단호하게 움직였는데, 그만큼 이번 계획의 규모와 강도는 업계가 직면한 위기의 심각성을 분명히 드러내고있다.

반면 다른 나라에서는 정치적 제약 때문에 이 정도 수준의 대응에 나서기 어렵다. 문제는 석유화학 같은 핵심 산업은 위기 상황에서 대응이 늦을수록 피해가 더 커진다는 점이다. 가령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의 많은 화학 기업도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유럽연합(EU)이 내놓은 정책의 실효성과 집행력은 모두 부족했고, 지난 7월 발표한 새로운 화학 산업 계획은 일각에서 '너무 약하고, 너무 늦었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런 점에서 이번 한국의 대응은 의미가 크다."

이번 산업구조 개편안에서 특별히 눈여겨본 부분은.

"아직 초기 단계지만 몇 가지 중요한 점이 눈에 띈다. 첫째, 정부가 기업의 설비 감축을 직접 조율하며 지원책과 연계하려는 역할을 맡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업계가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업이 이미 일부 감축에 나선 것은 동참 의지를 보여주는 신호다. 원래 큰 목표를 내건 정책일수록 집행 과정에서 위험이 따른다. 그럼에도 정부는 현실적인 기대치를 제시하며 분명한 신호를 보냈다. 특히 구윤철 부총리의 '무임승차는 없다'는 발언은 외신에서도 비중 있게 다뤘다. 다만 이번 지원책이 실제로 산업 재편과 통합으로 이어질지는 여전히 지켜봐야 한다. 이것이 한국 석유화학 산업구조 개편의 관건이다."

한국이 참고할 만한 해외 사례는.

"역사적으로 철강과 조선 같은 중화학공업은 구조조정이 쉽지 않았다. 유럽의 경우 철강업은 위기와 과잉공급이 반복됐고, 회원국의 정치적 이해관계 탓에 구조조정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유럽의 구조조정 사례는 일부 성과도 있었지만, 한계도 있었기 때문에 한국이 반면교사로 삼을 부분이 있다.

반면 일본은 철강업 구조조정을 추진할 때 정부가 주도하면서도 업계와 제도적 협의 구조를 구축해 포괄적인 접근을 보여줬다. 관련 정부 부처가 협의회를 설치하고, 이해관계자를 참여시켜 정책 방향과 업계 현실의 균형을 맞췄다. 한국이 참고해야 할 중요한 지점이다."

AI 등 첨단산업이 부상하는 상황에서 석유화학 같은 기간산업이 중요한 이유는.

"석유화학을 비롯한 중화학공업은 첨단 기술과 AI 시대에서도 중요한 산업이다. 화학 제품은 내연기관차뿐 아니라 전기차에도 필수고, AI 학습에 필요한 GPU 생산에도 필요하다. 이 밖에도 화학 제품이 쓰이는 첨단산업은 무수히 많다. 그렇기에 AI 시대가 와도 기간산업의 중요성은 여전히 크다. 물론 위기 상황에서는 정부 개입이 불가피하다. 대형 기업을 방치해 무너질 경우 정치·경제적 비용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가 산업 정책을 펼칠 때는 성장뿐 아니라 쇠퇴와 변화 과정까지 함께 관리해야 한다."

'성장뿐 아니라 쇠퇴와 변화까지 관리해야 한다'는 뜻은.

"중화학공업은 경제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커 위기 상황에서 정부 개입이 불가피하다. 이는 이론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타당하다. 산업 규모와 영향력이 큰 만큼 정부 개입을 반대하는 이들조차 대기업이 무너졌을 때 발생하는 정치·사회적 비용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본다. 따라서 정부의 산업 정책은 성장만 뒷받침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산업이 쇠퇴하거나 구조가 변할 때 충격을 최소화할 방안까지 함께 담아야 한다."

Plus Point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직격탄에 EU도 석유화학 체질 개선 착수…고부가가치 제품 육성 추진

/사진 셔터스톡

유럽 석유화학 산업도 최근 몇 년간 위기를 겪으며 생산 감축과 공장 폐쇄가 이어지고 있다. 결정적 계기는 2022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었다. 천연가스 가격 상승으로 생산 비용이 급등하면서 수익성이 감소했고, 중국발 공급과잉까지 겹치면서 시장점유율까지 잃게 됐다. 실제로 유럽화학산업협회(CEFIC)에 따르면, 2023년 EU 화학 제품 생산량은 전년 대비 8.5%, 팬데믹 전 수준(2014~2019년 평균)보다 11%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EU 집행위원회는 이에 지난 7월 일명 '화학 산업 행동 계획(CIAP·Chemicals Industry Action Plan)'을 내놓고 역내 화학 산업 경쟁력 강화에 나섰다. 에너지 비용을 낮춰 기업의 부담을 줄이고, 친환경·저탄소 화학제품과 바이오 소재 같은 고부가가치 제품을 육성해 선도 시장을 확보한다는 구상이다. 또 규제를 단순화해 기업 환경을 개선하고, '중요 화학물질 연합(Critical Chemical Alliance)'을 신설해 핵심 원료 공급망 안정화에도 나서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