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조지아주에 짓고 있는 현대차(005380)·LG에너지솔루션(373220) 합작 공장에서 한국인 근로자 300여 명이 체포·구금되면서 비자 제도 개선 필요성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재계는 수년간 인력 파견에 어려움을 호소하며 비자 쿼터(할당량) 확보 등 대책 마련을 요구해 왔지만 미국 의회의 반대에 한국 정부의 무관심에 막혀 진전이 없었다.

기업들은 이번 구금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로 비자 제도를 꼽는다. 한국 기업은 미국 투자를 늘리고 있지만, 현지에 파견할 인력이 비자를 받지 못해 전자여행허가제(ESTA)나 B1 단기 상용 비자를 이용해 업무를 처리해 왔다. 원칙적으로 이 비자로는 현지에서 일을 할 수 없는데, 미국이 이번에 이를 문제 삼은 것이다.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U.S. Immigration and Customs Enforcement)이 조지아주 내 현대자동차그룹과 LG에너지솔루션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의 한국인 직원 300여 명을 기습 단속·구금하는 사진을 공개했다./ICE 홈페이지 제공

재계는 2010년대 초반부터 미국 전문직 비자 쿼터 확보(E-4 비자 신설)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냈다. 현지에서 외국인 근로자들이 합법적으로 일하려면 전문직 취업(H-1B), 주재원(L1·E2) 비자가 필요한데 발급 수가 제한적이고 절차가 까다로워 인력 수급 불확실성이 컸기 때문이다.

특히 현지 공장 건설 등에 필수적인 기계·전기·소프트웨어 등 협력사 소속 엔지니어들이 받는 H-1B 비자 취득이 까다롭다. 미국은 연간 H-1B 비자 발급 한도를 8만5000개로 제한하는데, 이마저도 추첨으로 선정해 비자를 받는 한국인은 수년째 2000명 정도에 그치고 있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현재 쿼터를 확보한 나라는 2005년 이전 FTA를 체결하면서 협정 안에 비자 할당을 명시했다"며 "한국은 FTA 협정이 2007년으로 늦어지면서 타이밍을 놓쳤고, 이후 민간 중심으로 입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미 의회 반대를 넘어서지 못했다"고 말했다.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호주(1만500명), 싱가포르(5400명), 칠레(1400명) 등은 H-1B에서 파생된 특별 비자로 쿼터를 확보했다.

8일 서울 종로구 주한 미국대사관 앞에서 미국 비자를 발급받으려는 시민들이 줄 서 있다. /연합뉴스

미 의회와 노동계는 외국인 전문직 비자 확대가 자국 고용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해왔다. 한국 기업의 요구대로 제도를 바꾸면 미국 내 고용 창출 효과 없이 한국인 파견 인력만 늘어난다는 논리다. 미국은 한국 기업이 미국인 고용을 늘려야 한다는 입장이다.

미 의회가 외국인 전문직 비자 확대에 부정적인 가운데, 한국 정부와 국회 대응도 소극적이었다는 비판이 나온다. 한국무역협회·대한상공회의소 등이 미국 의회 관계자를 만나 비자 관련 애로 사항을 전달하고 비자 쿼터 확보의 필요성을 꾸준히 설득했지만, 정부나 국회의 관심과 지원은 상대적으로 부족했다는 것이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비자 문제는 정부가 나서줘야 하는 부분이라 외교부나 산업통상자원부 모두 책임이 있다"며 "한국에서 기업 의견을 듣는 간담회를 여는 것은 큰 효과가 없다"고 했다.

정부는 한·미 정상회담을 비롯한 여러 채널을 활용해 미국 측과 비자 문제를 협의해 왔다고 밝혔다. 이번 사태 수습을 위해 미국을 방문 중인 조현 외교부 장관은 비자 관련 논의를 본격화하는 한편, 산업통상자원부는 기업들과 비자 체계를 점검하고 개선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