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대리 시험 응시자) 구하고 신분 위조하는 것 다 포함해서 220만원입니다. 200만원까지 맞춰드릴게요."
한국에서 근무하길 원하는 외국인을 위해 현지에서 한국어 능력 시험(EPS-TOPIK·Employment Permit System-Test of Proficiency in Korean)을 대신 봐줄 수 있는지 묻자, 대리 시험 업체는 이렇게 답했다.
외국인이 고용 허가제 비전문취업(E-9) 체류 자격을 얻어 한국에서 취업하려면 외국에서 시행하는 EPS-TOPIK(EPS-토픽)에 먼저 합격해야 한다. 대리 시험 적발 위험을 걱정하자 이 업체는 "몇 년간 해 온 일이다. 걸리는 일 없다. 걱정 말라"고 했다. EPS-토픽 시험이 치러지는 모든 국가에서 대리 응시가 가능하다고 했다. EPS-토픽은 네팔·우즈베키스탄·방글라데시·몽골·베트남 등에서 치러진다.
이 업체는 대리 시험에 드는 비용을 220만원으로 제시하며 50만원을 선입금하라고 요구했다. 결제는 컬쳐랜드 모바일 문화상품권이나 스테이블코인(stablecoin·법정화폐에 가치가 연동되는 가상 자산) 테더(Tether)로 하라고 했다. 업체 관계자는 "업자들이 잡히면 계좌 결제 내역으로 고객도 조사받을 수 있기 때문에 서로 안전을 위해서 상품권으로 거래한다"고 했다.
한국에서 일하려는 외국인들이 늘면서 한국어 능력이 떨어지는 외국인을 겨냥해 EPS-토픽 시험에 합격시켜 주겠다고 유혹하는 불법 업체들이 활개 치고 있다. 온라인 포털 사이트나 소셜 미디어엔 '자격증 대리 시험' '위조 신분증' '외국인 신분증 제작' 등 시험 부정행위 관련 홍보 게시물을 쉽게 찾을 수 있다.
EPS-토픽은 한국산업인력공단과 양해각서를 체결한 현지 송출기관 관리하에 해외에서 치러지며 감독관은 국가별로 대부분 현지인이 맡는다. 대리 시험 업체는 시험 감독관을 매수하기 때문에 들킬 위험이 없고 합격이 보장된다고 광고한다. 이에 대해 한국산업인력공단은 "내부 기준에 따라 현지 시험위원을 공정하게 위촉·활용한다"고 말했다.
외국인의 EPS-토픽 응시자 수는 코로나19 특수 상황이었던 2021년 3만명으로 줄었다가 2022년 22만여 명으로 급증했고, 2023년(49만여 명)과 2024년(43만여 명)에는 40만명대로 늘었다.
국가별로 EPS-토픽 합격 점수는 큰 차이를 보인다.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입수한 '최근 5년간 국가별 한국어능력시험(EPS-토픽) 합격자 평균 점수 추이'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고용 허가제 송출국 16국 중 합격자 점수가 가장 높은 네팔은 평균 점수가 200점 만점에 191.9점에 달했다. 합격자 평균 점수가 가장 낮은 동티모르(112.3점)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점수다.
합격자는 고득점순으로 결정되고 국가별 선발 예정 인원의 3배수 풀(pool)로 구성된 구직자 명부에 포함된다. 한국 고용주는 한국어 점수와 기능시험 점수 등 객관적 지표를 합해 선정한 3배수 구직자 명부에서 선호하는 국적·연령·체격 등을 고려해 외국인 근로자를 선택한다.
외국인 근로자를 고용 중인 한 제조업체 관계자는 "한국에 일하러 오기 위해 한국어 시험 점수를 돈 주고 사는 외국인이 많다고 들었다. 적발돼서 처벌을 받는 경우는 극히 일부"라고 말했다.
국내 산업 현장에선 외국인 근로자들의 한국어 구사 능력이 떨어진다는 불만이 많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지난 4월 낸 '2025년 고용허가제 만족도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외국 인력을 활용한 중소기업 1177곳 중 61.7%가 고용 허가제에 만족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로 한국어 실력 부족을 꼽았다. EPS-토픽 점수가 높아도 실제론 소통이 어려워 점수를 신뢰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기본적인 한국어 능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입국해 일자리를 구하면 업무 효율이 떨어지고 안전사고 위험이 높아진다. 경기도 안성의 연매출 800억원 규모의 한 제조업체는 공장 근로자의 약 90%가 외국인이다. 베트남·필리핀·중국 국적이 많은데, 일부를 빼면 거의 한국어를 못 해서 같은 국적의 근로자끼리만 대화한다고 한다.
이 업체 대표는 "한국인 관리자도 외국인 근로자와 소통이 안 돼 어려움이 있다. 생산성이 떨어지는 것도 문제인데, 의사소통이 안 돼 안전사고가 일어날까 봐 걱정이 많다"고 말했다.
업계에선 EPS-토픽 시험의 부정행위를 더 철저하게 단속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대리 시험을 치르다 적발되면 부정 행위자는 4년간 응시가 제한되고 업무방해죄 등으로 형사 처벌을 받을 수 있지만, 적발 건수는 많지 않은 편이다.
지난 2020년에 EPS-토픽 대리 시험을 의뢰한 네팔인 52명과 대리 시험을 본 6명이 한국에서 검거된 바 있다. 52명 중 51명은 강제 출국됐고, 대리 응시자 6명 중 5명은 구속됐다. 의뢰인 중 다수는 한국어 시험 문제를 읽지도 못하는 수준이었으나 만점을 받은 사람도 있었다. 검거 직전 연도인 2019년 네팔의 EPS-토픽 합격자 평균 점수는 192.6점이었는데, 검거 후인 2023년에 152.5점으로 떨어졌다가 작년엔 다시 191.9점으로 높아졌다.
한국산업인력공단은 부정행위 적발 통계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공단 관계자는 "부정행위 현황이 공개되면 공단 및 제도 자체에 대한 공신력이 저하되는 등 조직(공단)의 정당한 이익을 침해당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공단은 지난해 네팔 응시자의 EPS-토픽 평균 점수가 만점에 근접한 데 대해 "열심히 해서 잘한 것이다. 목숨 걸고 하려는 사람이 많고 치열하게 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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