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 DB그룹 창업회장이 지난 2004년 아들인 김남호 DB그룹 명예회장에게 동부정밀화학(현 DB(012030)) 주식 84만주를 증여하면서 약 20년간 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도록 한 건 그룹 장악력을 놓지 않으려는 장치로 해석된다.

법조계에선 부자 간 증여 계약을 체결하면서 20년간 의결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한 것은 이례적으로 긴 시간으로 보면서 위반 시 손해배상 청구를 가능하게 했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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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김남호 DB 명예회장, 20년 의결권 제한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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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챗GPT 달리3

상속·증여에 민감한 재벌가에서 재산을 증여할 때 조건을 다는 경우는 종종 있다. 최근 한국콜마그룹 오너 일가의 경영권 분쟁에서 드러난 증여 조건이 대표적이다. 윤동한 콜마 회장은 2018년 장남 윤상현 부회장에게 콜마홀딩스(024720) 주식 230만주를, 장녀 윤여원 대표에게 콜마비앤에이치(200130) 주식 128만9064주를 증여하며 '3자 경영 합의'를 조건으로 달았다.

남매간 갈등이 커지자 윤동한 회장은 증여 조건을 되짚어 법적 대응에 나섰다. 윤 회장은 "증여는 3자 간 경영 합의를 전제로 한 것인데, 현재 경영 질서가 훼손되고 있다"며 윤상현 부회장을 상대로 지난 5월 30일 주식 반환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김준기 창업회장도 지분을 증여하면서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는 조건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이는 상법상 주주 평등의 원칙에 반할 수 있지만, 개별적으로 공증을 받아 주주 간 계약서에 포함하면 계약 자유의 원칙에 따라 유효하다.

의결권 행사 제한과 같은 주주 간 계약은 당사자끼리만 효력이 발생하고 회사에 대한 대항력은 없다. 만약 김남호 명예회장이 계약을 어기고 증여받은 주식에 대한 의결권을 행사하더라도 의결권 행사 자체는 유효하다.

다만 당사자 간 계약 위반에 따른 책임이 뒤따를 수 있다. 정확한 계약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김 명예회장도 이런 조항을 고려해 긴 시간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20년간 의결권을 제한한 건 이례적이라고 법조계는 본다. 정병원 원앤파트너스 대표 변호사는 "의결권 행사를 20년간 제한한 것은 지나치게 긴 시간이다. 법원에서 주주 권리를 형해화(겉모습만 남고 본래의 기능이 사라진 상태)하는 것으로 보고 주주 간 계약 자체를 무효라고 판단할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한 지배구조 전문가는 "신탁제도가 발달한 미국에서는 수증자가 너무 어리거나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는 경우 주식 소유권을 일정 기간 수탁자에게 이전하고 수탁자가 의결권을 행사하는 방식을 활용한다. 주식 소유주와 의결권 행사자가 다른 것인데, 국내에서는 오랜 기간 공익재단이 이런 역할을 대신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