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서열 40위 DB(012030)그룹의 김준기(81) 창업회장과 아들인 김남호(50) 명예회장의 갈등이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다. 김 창업회장과 김 명예회장의 갈등이 봉합되지 않으면 그룹의 후계 구도에도 변화가 생길 것이란 관측도 있다.

김 명예회장은 2020년 7월 그룹 회장에 오른 지 약 5년 만인 지난 6월 명예회장으로 내려왔다. 이는 가사 도우미와 비서에 대한 성폭행·성추행 혐의로 2017년 회장직에서 물러났다가 2021년 미등기 임원으로 경영에 복귀한 김 창업회장의 의중에 따른 것이다. 김 명예회장은 2027년 3월 사내 이사에서도 물러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그래픽=손민균

김 명예회장이 회장을 맡았던 기간에도 내부 임원 인사는 김 창업회장의 뜻대로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6월 이수광(81) 전 DB손해보험(005830) 사장이 신임 회장으로 선임됐을 때 재계에서는 김 창업회장이 사이가 좋지 않은 아들을 밀어내고 측근을 회장직에 앉힌 것이란 말이 나왔다.

두 사람의 사이는 김 창업회장이 회장직에서 물러난 후 미국에서 도피 생활을 할 때 결정적으로 틀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김 명예회장의 누나인 김주원(53) DB그룹 부회장은 아버지를 살뜰히 챙긴 반면 김 명예회장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김 명예회장은 회장직에 오른 후 김 창업회장의 심복들과도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2021년 김 창업회장의 부인인 김정희 여사가 별세했을 때도 장례 문제로 다툰 것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은 DB하이텍 매각과 관련해서도 의견 차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DB그룹의 반도체 파운드리 계열사인 DB하이텍(000990)은 김 창업회장의 결정에 따라 반도체 경기가 좋지 않을 때도 투자를 지속해 왔다.

2007년 동부일렉트로닉스와 동부한농이 합병하면서 만들어진 DB하이텍(옛 동부하이텍)은 2015년까지 당기순손실을 기록했으나, 꾸준한 투자가 뒷받침되면서 2015년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2022년에는 매출액 1조6695억원, 영업이익 7619억원, 당기순이익 5562억원을 기록해 최고 실적을 기록했다.

DB그룹은 DB하이텍을 국내 대기업에 매각하는 방안을 추진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재계 관계자는 "그룹을 키워온 김 창업회장 입장에서는 아들의 결정이 못 미더웠던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이 직후 김 창업회장은 DB 지분을 추가로 확보했다. 2021년 말 김준기 회장의 DB 지분은 11.61%였으나, DB김준기문화재단이 소유한 4.30%를 매수하면서 15.91%로 늘렸다. 일반적으로 자식에게 승계하려면 자신의 지분은 낮추고 자식 지분을 늘려야 하는데, 거꾸로 한 것이다.

일각에서는 DB그룹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일들의 배경에 '부자 갈등' 외에 '남매 갈등'이 있다는 말도 나온다. 김주원 부회장이 그룹 경영권을 차지하기 위해 아버지와 손을 잡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김 부회장은 서울예고·연세대 음악대학을 졸업한 뒤 2021년 DB하이텍 미주법인 사장을 맡으면서 그룹에 합류했고 2022년 7월부터 그룹 부회장을 맡고 있다.

현재 DB 지분은 김 명예회장 16.83%·김 창업회장 15.91%·김주원 부회장 9.87%로 김 명예회장이 최대 주주이지만, 아버지가 딸에게 지분을 넘겨 주면 김 부회장이 최대 주주가 될 수 있다.

DB그룹은 경영권 분쟁의 가능성은 낮다고 밝혔다. DB그룹 관계자는 "김준기 창업회장은 창업 이래 지금까지 그룹 총수이자 동일인이다. 경영권 분쟁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부자 갈등은 물론이고 남매 갈등도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