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라구나주 파에테(Paete) 출신 마크(Mark) 씨는 2023년 초 한 달에 8만5000페소(약 207만원)를 준다는 공고를 보고 한국 계절 근로자에 지원했다. 마크 씨는 2023년 4월에 입국해 강원도 양구군에서 수박·고추를 재배했다. 당초 계약은 하루 8시간 근무였으나, 실제로는 하루 11시간 근무했다. 초과 근무 수당은 없었다.
마크 씨는 비자 발급·여행보험·건강검진 등의 명목으로 한국 브로커(중개인)에게 6만페소(약 146만원)를 입금하고 '계약을 완료하지 않을 경우 50만페소(약 1215만원)를 연대 보증인이 지급한다'는 내용의 약정서에도 서명했다. 또 브로커에게 기본 수수료 144만원과 5개월 초과 근무 시 매월 24만원씩 총 216만원을 냈다. 현행 규정상 브로커는 계절 근로자 모집·송출 과정에 개입하거나 계절 근로자로부터 돈을 받을 수 없다.
미국이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지역의 강제 노동 실태 조사를 강화하면서 외국인 근로자가 생산 과정에 참여한 제품·농수산 식품의 미국 수출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가운데, 불법 브로커가 강제 노동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라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 관세·국경보호청(CBP·Customs and Border Protection)은 제품 생산 과정에서 국제노동기구(ILO·International Labour Organization)가 규정한 11개 강제 노동 지표를 위반한 사실을 확인하면 해당 제품 수입을 금지할 수 있다.
▲취약성 악용 ▲이동 제한 ▲사기 ▲가혹한 생활 및 근로 조건 ▲임금 지급 거부 ▲과도한 초과 근무 등도 강제 노동 지표에 포함되는데, 브로커가 개입한 외국 계절 근로자에게 이런 일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일부 브로커는 계절 근로자가 도망가지 못하게 여권을 압수하기도 한다.
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는 지난달 30일 마크 씨처럼 강원도 양구군에서 일했던 필리핀 계절 근로자 91명을 대리해 고용노동부 강원지청에 체불 임금에 대한 집단 진정을 제기했다. 필리핀에서 강원도 양구군으로 온 외국인 근로자는 2023년 476명, 2024년 541명 등 총 1017명으로 브로커가 이들에게 갈취한 금액은 20억원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필리핀 해외이주노동자부(DMW·Department of Migrant Workers)는 이를 문제 삼아 지난해 1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쳐 인력 송출을 중단하기도 했다.
부실한 외국인 계절 근로자 관리가 국제 문제로 비화하자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은 이달 1일 전담팀을 구성해 조사에 착수할 것을 지시했다. 고용부는 농가와 외국인 근로자 사이에 브로커가 개입해 수수료를 편취했다고 보고 있다.
고용부는 최근 진정인(필리핀 계절 근로자)과 피진정인(브로커)에 대한 조사를 마쳤는데, 브로커에 대해서는 근로기준법상 중간 착취 배제 조항 위반 여부도 조사할 방침이다. 법무부 지침에 따르면 사인 또는 단체가 근로자 모집·송출 등을 위임받아 수행하면서 유·무형의 대가를 주고받는 행위는 중대 위반 사항이다.
해당 브로커는 필리핀 DMW에 등록된 합법 업체라고 하지만, 한스 카닥(Hans Candac) DMW 장관은 이곳이 DMW 데이터베이스(DB)에 없는 불법 업체라고 밝혔다. 피해자에게 고소당한 브로커의 사무실 등 정보도 허위였다.
외국인 계절 근로자 브로커 문제는 미국도 예의 주시하고 있다. 지난해 미국 국무부가 발표한 인신매매 보고서에는 "한국의 계절 근로자 모집인(브로커)들은 수천 달러에 이르는 과도한 수수료를 근로자들에게 부과해 부채에 기반한 강제 노동을 가능하게 한다. 베트남·필리핀·태국·캄보디아·인도네시아·몽골 출신 이주 노동자들의 강제 노동에 일조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필리핀 정부가 항의 차원에서 인력 송출을 금지한 점도 미국 측은 인지하고 있다.
☞ 관련 기사
[관리 사각지대 외국인력]
https://biz.chosun.com/tag/foreign-wor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