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차전지 4대 핵심 소재(양극재·음극재·전해질·분리막) 중 하나인 음극재를 흑연 대신 실리콘으로 만드는 실리콘 음극재 개발에 국내 기업들이 뛰어들고 있다. 실리콘 음극재는 기존 흑연 음극재보다 에너지 밀도가 4~10배가량 높아 전기차 충전 시간을 단축하고 주행거리를 늘릴 수 있는 차세대 배터리 소재로 꼽힌다. 국내 기업들은 중국이 장악한 흑연 공급망에서 벗어나려는 방안 중 하나로 실리콘 음극재 개발을 서두르고 있다.
HS효성(487570)은 효성그룹과 계열 분리한 후 첫 번째 신사업으로 실리콘 음극재를 점찍고 투자에 나섰다. HS효성의 자회사 HS효성첨단소재는 지난 7일 벨기에 유미코아(Umicore NV)가 발행하는 3000만유로(약 448억원) 규모의 사채를 전액 취득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유미코아는 배터리 소재와 촉매를 제조하는 회사로, 독일 폴크스바겐 등에 배터리 소재를 공급하고 있다.
이번 투자는 조현상 HS효성 부회장이 이차전지 소재 사업 진출을 염두에 두고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타이어코드(타이어에 들어가는 필수 섬유 소재)와 탄소섬유에 이어 배터리 소재로 사업 분야를 다각화하려는 움직임으로 보인다. HS효성 관계자는 “유미코아 측과 사업 제휴를 어떻게 할지 아직 협의 중인 단계로, 실리콘 음극재 사업 진출을 확정한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포스코그룹 산하 이차전지 소재 기업 포스코실리콘솔루션은 7일 포항 영일만 산업단지에서 상공정과 하공정을 모두 갖춘 실리콘 음극재 공장을 준공했다. 포스코그룹은 2022년 7월 실리콘 음극재 스타트업 테라테크노스를 478억원에 인수해 이듬해 공장 건설을 시작했다. 올해 4월 실리콘 합성물을 코팅하는 하공정 공장을 먼저 구축한 후 7개월 만에 산화물계 실리콘을 합성하는 상공정도 구축했다. 원재료를 구매해 상공정에서 실리콘 합성물을 생산한 후, 하공정에서 각 고객사의 필요에 맞게 맞춤형으로 가공하는 구조다.
현재 실리콘 음극재 공장의 생산능력은 전기차 27만 5000대를 생산할 수 있는 연산 550톤(t) 수준이다. 2030년까지 연산 2만 5000t 규모의 생산체제를 구축한다는 게 포스코그룹 측의 목표다. 포스코그룹 관계자는 “상공정과 하공정을 모두 자체적으로 보유해 외부에 의존하지 않게 되면서 운신의 폭이 넓어졌다”고 말했다.
음극재는 양극에서 나온 리튬이온을 저장했다가 방출하면서 전류가 흐르게 하는 역할을 하는 소재다. 배터리 원가의 약 14%를 차지한다. 현재 음극재를 구성하는 원료로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은 흑연이다. 국내 배터리업체들은 중국산 흑연에 97% 이상 의존해 왔다. 중국은 전 세계 천연 흑연 시장 점유율 67% 이상을 차지하며 공급망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미국이 중국산 광물을 쓴 배터리를 제재하면서도 흑연에 한해서는 제재 조치를 2년간 유예하기로 했을 만큼 각국의 중국산 흑연 의존도가 절대적이다. 산업계에서는 중국이 이런 상황을 이용해 흑연 수출 통제에 나설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배터리 소재 업체들은 흑연 기반 음극재에 실리콘을 첨가하는 방식으로 실리콘 음극재 상용화를 시도하고 있다. 실리콘은 리튬 원자를 흑연보다 많이 저장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충전 과정에서 흑연 대비 3~4배 더 팽창하는 단점 때문에 상용화가 쉽지 않았다. 실리콘 구조를 안정화해 부피 팽창과 그로 인한 폭발 위험을 없애는 것이 실리콘 음극재 시장 선점을 위한 관건이다. 현재 대주전자재료(078600)가 실리콘 음극재를 양산하며 3분기 기준 5~6종의 전기차에 공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