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소송 항소심 판결이 SK 승계 구도에 영향을 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최 회장이 1조3808억원의 재산분할을 위해 회사 지분 매각까지 검토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면서 최 회장이 계획한 승계 시나리오에 차질이 생길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최 회장이 동거인과 재혼한다면 구도는 더 복잡해진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왼쪽)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 /뉴스1

20일 재계에 따르면 최 회장과 SK그룹은 2심 판결의 ‘치명적인 오류’를 지적하며 재판부 판단에 이의를 제기했다. 재판부는 이를 수용해 1998년 5월 당시 주당 가치와 최 회장의 기여도를 수정했다. 다만 재산 분할 비율과 분할금 등 결론은 그대로 유지했다.

최 회장으로서는 파기환송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대법원이 2심과 같은 판단을 내리는 최악의 시나리오도 염두에 둬야한다. 최 회장은 대법원 상고심에서 결과를 뒤집지 못하면 1조3800억원 넘는 현금 재산을 분할해야 한다.

재계에서는 기존 보유한 SK㈜(17.3%)와 비상장사 SK실트론(29.4%) 주식을 활용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특히 분할 재산의 지급이 늦어질 경우 천문학적 지연이자가 붙는다는 점에서 SK㈜의 지분 활용이 불가피하고, 최 회장의 그룹 지배력이 취약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다만 노 관장 측도 SK그룹 지배구조 약화를 바라지는 않는 분위기다. 노 관장 측 법률대리인은 2심 판결 후 “SK그룹 지배구조가 흔들리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며 “SK㈜의 우호 지분으로 남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는 최 회장과 자신 사이의 3남매 중 누군가가 가업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속내로 비춰지는 발언이다.

최 회장의 승계 계획은 외부에 구체적으로 드러난 적이 없다. 2023년 말 인사로 장녀 최윤정 씨의 경영수업은 시작됐지만, 친인척이 경영에 참여 중인 데다 최 회장의 자녀들은 지주사 지분이 전혀 없어 승계 구도에 대한 구체적 예측도 어려운 상황이다.

최 회장이 노 관장과 이혼한 뒤 동거인 김희영 티앤씨재단 이사장과 재혼한다면 셈법은 복잡해진다. 최대 변수는 최 회장과 김 이사장 사이의 자녀, 그리고 또 하나의 아들이다.

이혼이 확정될 시, 노 관장의 상속 비율은 0이 되고, 3남매 자녀의 상속 비율은 각각 1씩 총 3이 된다.

반면 최 회장과 김 이사장의 재혼을 전제로 김 이사장은 배우자로서 상속 비율 1.5에 최 회장과의 딸 몫 1까지 2.5에 해당하는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다. 여기에 김 이사장이 전남편 사이에 둔 것으로 알려진 아들을 최 회장이 친양자로 입양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경우 상속 비율은 김 이사장이 3.5로 노 관장의 3남매(3)를 넘어서게 된다.

이번 소송을 두고 노 관장이 향후 경영권 분쟁을 대비해 자신의 자녀들이 활용할 수 있는 실탄 마련에 나선 것이라는 재계 일각의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이같은 가정과 별개로 여야가 합의해 추진 중인 ‘유류분 제도’ 개정 후에는 SK 승계 구도가 새로운 국면을 맞을 수 있다. 현행 유류분 제도는 고인의 뜻과 상관없이 형제·자매에게 일정 비율의 상속 금액을 보장한다.

하지만 4월 헌법재판소는 유류분에 관한 일부 조항에 대해 위헌결정을 하고,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이 제도는 유언을 통해 특정 상속인에게 지분을 몰아주는 등 피상속인의 의사를 강하게 반영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개정될 가능성이 높다. 최 회장이 김 이사장에게 많은 지분을 증여하더라도, 재산 형성 기여와 관련한 노 관장 삼남매 측의 주장이 힘을 잃을 수 있다는 얘기다.

상속전문 채애리 변호사(마루법률사무소)는 유류분 제도 개정 후 SK 승계 구도에 대해 “유류분 제도 개정의 취지는 현행과 달리 유언자의 의사를 최대한 존중하는 쪽으로 바꾸자는 것이다”라며 “노 관장 측 입장에서는 지분 상속이 유리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고 말했다.

최 회장은 지난해 10월 블룸버그 통신과 인터뷰에서 “그룹 승계구도는 생각 중이고 준비해야 한다. 스스로 어떤 사고를 당했을 때 SK그룹을 누가 이끌 것인지 승계 계획이 필요하다”며 “나만의 계획이 있지만 아직 밝힐 때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최 회장은 자녀에게 무조건 경영권을 승계해주는 것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입장도 드러낸 적 있다. 그는 2023년 7월 대한상의 주최 제주포럼에서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것보다, 내가 안전하게 은퇴할 수 있는 회사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 주주로서의 베네핏(이익)을 물려주는 게 더 자유로울 것”이라고 말했다.

IT조선 이광영 기자 gwang0e@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