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토종 배(pear)와 블랙베리, 그리고 오크(참나무)와 바다 소금.
영국 향수 브랜드 ‘조 말론 런던’의 대표 제품은 기존 회사들이 사용하지 않는 원료로 만들어졌다. 달콤한 과일 향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만 꽃과 달리 과육과 수분이 많은 과일은 향수를 만들기 적합한 원료가 아니다. 싱그러운 숲과 바다 냄새를 싫어할 사람이 있겠느냐마는, 이 향수를 만들려는 시도도 좀처럼 없었다. 오크나 바다 냄새가 명확하지 않은 데다 이를 채취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조 말론 런던의 제품 생산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 과정에 가깝다. 본래 향수는 동네 공방에서 손쉽게 만들 수 있을 만큼 제조 과정이 간단하지만, 조 말론 런던은 한 제품의 생산 방법을 고안하는 데만 2년이 걸린다. 조 말론 런던의 성장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셀린 루(Céline Roux) 글로벌 프로그란스 디렉터는 “틀을 깨면(push the boundaries) 전에 없던 새로운 제품을 만들 수 있다”며 “이게 바로 우리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해 다르게 생각하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최근 루 디렉터를 조 말론 런던 본사인 타운하우스에서 만나 인터뷰했다.
처음 조 말론 런던은 여러 향을 겹쳐 쓰는(layering) 것으로 유명세를 탔다. 그런데 창업자 조 말론이 유방암 투병 이후 미국 에스티로더 그룹에 회사를 매각하고, 겹쳐 쓰는 향수를 모방하는 후발주자들이 속속 등장했다. 영국적인 가치를 브랜드의 핵심으로 내세웠지만, 미국 거대 화장품 그룹 소속으로 지배구조가 바뀌고, 경쟁사의 추격을 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지난 십 년 동안 조 말론 런던은 오히려 큰 폭 성장했다. 조말론은 지난해(2023년 회계연도) 연간 1700억원의 매출을 냈고, 영업이익으로 500억원을 벌어들였다.
향수를 만든 역사가 족히 수백년을 넘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전통 회사들은 물론, 샤넬·디올 같이 향수 시장에서도 큰 존재감을 과시하는 글로벌 명품 브랜드와 경쟁하면서도 조 말론 런던이 크게 성장한 비결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조 말론 런던이 원하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 향기를 채취하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전통적인 향수 업계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혁신을 이뤘다고 평가한다. 실제로 조 말론 런던은 새 제품을 내놓을 때 제품을 만든 독특한 생산 방식도 함께 공개한다.
이런 측면에서 조 말론 런던의 짧은 역사는 새로운 시도를 가능하게 하는 환경으로 작용했다. 영국 조향사 조 말론이 1990년 본인의 이름을 걸고 회사를 세운 것이 시작이었으니, 30년이 조금 넘은 조 말론 런던의 역사는 프랑스 겔랑이나 이탈리아 산타 마리아 노벨라와 비교할 게 못 된다.
루 디렉터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는 쉽지 않지만 새로운 방식을 찾아낸다”며 “새로운 원료를 찾기 위한 여정은 아주 즐겁다”라고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잉글리시 페어 앤드 프리지아’와 ‘블랙베리 앤드 베이’ 제품이다. 보통 향수는 장미, 라벤더같이 냄새가 좋은 익숙한 원료에서 향을 추출하는 것으로 생산이 시작된다. 하지만 조 말론 런던은 스토리를 먼저 만들고 그다음 재료를 선별한다.
영국적인 전통에서 영감을 받은 제품으로 유명한 조 말론 런던은 늦여름의 끝자락, 가을에 진입하는 시기, 따뜻한 햇볕 아래 과즙이 풍성한 영국 토종 배가 익어가는 영국적인 풍경을 향수 제품으로 만들기로 했다. 생각만으로 행복해지는 풍경이지만, 배로 향수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꽃과 달리 과일은 과육 분자가 있고, 수분이 많은 과육에서 향을 추출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오랜 연구 끝에 조 말론 런던은 배 주스를 만드는 공장을 찾았다. 루 디렉터는 “배 주스를 만들 때 배를 오랫동안 끓이는데 이 과정에서 나온 배향 가득 담긴 수증기를 포집했다”며 “수증기에서 수분을 제거하고 배 분자를 추출해 향수를 만드는 데 활용했다”라고 설명했다. 완전히 새로운 이 생산 방식을 구축하는 데에만 2년이 걸렸다.
‘블랙베리 앤드 베이’가 탄생한 과정도 혁신적인 스토리로 가득하다. 처음 조 말론 런던은 입술이 까맣게 변할 정도로 들판에서 블랙베리를 따 먹던 어린 시절의 즐거움을 떠올렸다. 블루베리가 아니라도 딸기를 따거나 버섯을 캐기 위해 따뜻한 봄 햇살 아래 들판을 뛰며 맡았던 달콤한 향기를 재현하고 싶었다.
루 디렉터는 “하지만 블랙베리 향을 채취하기 위한 시도는 전에 이뤄지지 않은 작업이었고, 참고할 선례도 없었다”며 “다양한 방식을 오래 검토한 끝에 조 말론 런던은 스코틀랜드에 있는 잼 생산 업자와 협업하게 됐다”고 말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잼 같이 빵에 발라 먹는 콩피(confit)를 즐겨 먹는데, 조 말론 런던은 콩피를 생산하는 스코틀랜드 업체와 협업해 블랙베리 잼을 만들고 남은 잔류물을 향수 원료로 사용했다.
루 디렉터는 “스토리를 기반으로 원료가 결정되면 원료에서 향기를 채취해야 한다”며 “가끔 재료 냄새와 추출된 향기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일치시키기 위해서도 많은 기술과 노력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영국 로빈 후드가 몸을 숨겼다는 셔우드(Sherwood) 숲에서 영감을 받은 ‘잉글리시 오크’ 시리즈는 오크를 커피콩 볶듯 오븐에 로스팅하는 방법으로 향을 채취했다. 향을 채취하는 과정에서 여러 번의 시행착오가 있었다. 장작처럼 오크를 태워보기도 했지만, 이 냄새는 바비큐 향에 가까웠다. 오랜 시도 끝에 오크를 오븐에 로스팅해 캐러멜처럼 만들어(caramelize) 적합한 향을 찾았다.
루 디렉터는 “엄밀히 말하자면 오크 향은 존재하지 않지만 많은 사람이 오크를 생각하면 떠올리는 향을 만들고 싶었다”며 “언제나 틀을 깨고 싶었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을 거듭했다”라고 설명했다.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원료를 쓸 땐 헤드 스페이스(head space)라는 장비를 활용하기도 한다. 향의 원료가 멸종 위기에 처해 있거나, 만지면 금방 시들어버리는 꽃인 경우인데, 개화 기간이 15일 남짓한 인동초(honeysuckle) 향을 채취할 때 사용했다. 꽃을 감싸는 동그란 유리병 안에 모인 분자를 활용해 제품을 만든 것이다.
루 디렉터는 “인동초는 벌과 나비를 끌어모으고 싶은 시기에 따라 스스로 향을 조절하기 때문에 아침, 낮, 밤 향기가 다르다”며 “조 말론 런던은 꿀 냄새가 진하고 사랑스러운 느낌이 강한 밤에 헤드 스페이스를 이용해 향을 채취해 제품을 만든다”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