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를 이끄는 중견·중소기업의 2·3세 경영이 본격화하고 있다. 이들은 선대로부터 배운 승부 근성과 해외 경험을 발판 삼아 글로벌 무대로 뻗어나간다. 1세대 기업인을 뛰어넘기 위해 2·3세가 어떤 고민을 하고 앞으로 무엇을 하려는지 들어본다. [편집자주]

"많은 중견·중소기업이 산업의 위기를 신사업으로 풀어내려고 합니다. 수년간 내부 인재 수십명을 투입해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죠.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신사업을 추진했다가 실패하면 회사가 휘청거리기도 합니다. 저도 100억원이란 큰돈을 들여 신사업에 나섰다가 제품 상용화에 실패한 경험이 있습니다. 내부 자원이 아니라 외부 인재·기술에서 답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한 건 '이거라도 해보자'는 절박함 때문이었습니다."

지난달 25일 서울 강남구 선보빌딩에서 만난 최영찬(43) 선보엔젤파트너스(선보엔젤) 대표는 벤처캐피털(VC)을 차린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선보공업 2세다.

1986년 최금식 회장이 부산에 설립한 선보공업은 엔진을 제외한 배 부품 대부분을 만드는 곳이다. 2000년대 초부턴 이를 세계 최초로 모듈화해 제작·판매하고 있다. 사명인 선보(船寶)는 '배가 보배'라는 뜻이다. 선보공업은 지난해 매출 1670억원, 영업이익 89억원(선보유니텍, 선보하이텍 등 계열사 합산)을 올렸다. 최 회장의 아들인 최영찬 대표는 미국 위스콘신대 경제학과 졸업한 뒤 2005년 만 25세에 선보공업 생산직 사원으로 입사했다.

최영찬 선보엔젤파트너스 대표는 "선보공업을 에너지 기업으로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 장련성 기자

◇ "100억원을 10개 회사에 10억원씩 뿌렸더라면…"

"선보공업에 들어왔을 땐 조선업이 활황이었어요. 대기업, 중견·중소기업을 망라하고 조선업에 있는 기업은 대부분 해양 플랜트 등 신사업에 투자하거나 해외 진출을 모색하던 시기에요. 대부분 실패했죠. 저도 2008년에 100억원을 들여 선박 평형수 처리장치(BWMS·선박 균형을 위해 탱크에 담는 바닷물 살균)를 연구·개발해 제품까지 만들었지만 이를 상용화해서 매출을 올리는 단계까진 가지 못했어요. 연어를 운반하는 노르웨이 조선소가 매물로 나와 신사업으로 해볼까 싶어 인수·합병(M&A) 검토도 했었죠."

최 대표는 "중견·중소기업의 이런 신사업 방식은 대부분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기업의 자원 90% 이상이 당장 물건(서비스)을 만들어 팔고, 문제가 생기면 사후관리(AS) 하기 위해 존재한다"며 "신사업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 없고, 있다 해도 인센티브가 없다. 운 좋게 좋은 아이디어가 회장까지 올라오더라도 오너의 직감에 의해 사업 여부가 결정되고 사후 관리도 전혀 안 된다"고 말했다.

최 대표는 거듭되는 실패를 통해 밖에서 답을 찾아야겠다는 결론을 냈다. 그는 "'100억원을 한 아이템이 아니라 10억원씩 10개에 나눠서 했더라면' '많은 인력·시간을 들여 우리가 직접 개발할 게 아니라 외부 기술을 도입했더라면' 하는 가정이 VC의 출발점이었다"고 말했다.

그래픽=정서희

그가 2016년 선보공업 신사업팀을 스핀오프(분사) 해 설립한 선보엔젤은 선보공업 및 관계사의 자본금으로 투자하는 회사다. 비슷한 고민을 하는 다른 기업의 자본금도 투입된다. 현재까지 118개 기업에 총 368억원을 투입했다. 지분가치는 1000억원으로 추산된다.

선보엔젤은 신재생에너지 부문 투자에 적극적이다. 엘켐텍이라는 중소기업에 80억원을 투자해 2대주주에 오른 것이 대표적이다. 엘켐텍은 전기분해 기술을 이용해 물을 수소로 만드는 그린수소 발생기를 만든다.

최 대표는 "엘켐텍은 그린수소 분야에서 세계적인 기술력을 갖추고 있으나 작은 규모로 품질이 낮고 불량도 많았다"면서 "선보유니텍에 에너지설루션사업부를 만들어 엘켐텍의 그린수소 발생기가 탑재된 시스템을 국내 최초로 내놓고 호주·유럽 등 해외 진출도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엘켐텍의 그린수소 발생기. 선보유니텍은 이를 전문적으로 시스템화했다. /선보유니텍 제공

그는 "조선뿐 아니라 자동차, 석유화학, 철강 등 화석연료에 기반한 산업에 있는 기업이 갑자기 인공지능(AI)이나 바이오에 진입하면 경쟁력이 없다"면서 "화석연료는 결국 신재생에너지로 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선보공업의 미래로 생각하고 투자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수소 기술 기업에 투자한 것은 신재생에너지를 저장, 운송하기 위한 수단으로 각광받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울산과학기술원(UNIST)과 함께 탄소 포집 설루션 개발 기업인 '카본밸류'라는 회사를 공동 설립하기도 했다. 카본밸류는 SK에코플랜트로부터 30억원 규모의 실증 사업을 수주했다.

그는 "아무리 수소를 써도 나올 수밖에 없는 탄소를 저장·재활용하는 사업에 직접 개입해 성과를 내고 있다"며 "지난 7~8년간 밖에서 오픈 이노베이션(개방형 혁신)을 추진하고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앞으로 선보공업에 나아가야 할 방향이 '에너지 기업'이란 걸 명확히 알게 됐다"고 말했다.

최영찬 대표는 신사업 방향을 고민하는 중견기업 2세들과 머리를 맞대고 투자도 함께 하고 있다. /선보엔젤파트너스 제공

◇ 미래 고민하는 2세들과 함께 뛴다

최 대표는 선보엔젤뿐 아니라 2017년 라이트하우스라는 국내 최초의 중견기업 연합 VC를 만들었다. 혁신 산업으로 전환하기 위해 비슷한 고민을 하는 전통 산업 중견기업들이 참여하고 있다. 사업적 시너지(상승효과)가 날 수 있는 스타트업에 우선 투자한다.

시작은 2015년 최 대표가 만든 스타트업 공부 모임이었다. 선보공업을 포함해 태광(023160), 조광페인트(004910), 기성전선, 오토닉스 5개 회사 2·3세가 머리를 맞대고 공부해 보자는 취지였다. 스타트업 기업설명(IR)을 듣고 소액으로 투자하거나 사업 논의를 시작한 게 출발점이었다.

최영찬 선보엔젤 대표는 "많은 2세들이 조직 내에서 '시한폭탄' 취급을 받지만,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진지하게 미래를 고민하는 경우도 있다"며 웃어 보였다. / 장련성 기자

라이트하우스의 취지에 공감한 KDB산업은행이 먼저 펀드 조성을 제안했다. 2017년 산업은행과 파트너 중견기업이 돈을 댄 413억원 규모의 '중견기업 연합펀드 1호'가 만들어졌다. 최근 2호 펀드가 700억원 규모로 조성됐다. 산업은행뿐 아니라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이 새롭게 참여했다.

최 대표는 2013년 선보공업의 지분 승계를 마무리지었다. 현재는 최금식 회장이 경영일선에 있다.

그는 "1세대 기업인들은 굉장히 보수적이지만 아버지는 10년 전부터 토지·노동·자본으로 하는 산업은 끝났다며 다양한 시도를 할 기회를 줬다"며 "많은 2세가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벽에 부딪히고, 임직원 사이에선 언제 사고 칠지 모르는 '시한폭탄' 취급을 받지만, 부족함을 알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