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에 힘을 쏟으며 자체 보고서까지 발간하는 재계가 ESG 공시 의무화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새로운 기준에 맞춘 ESG 정보를 취합하는 시스템을 구축할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한 만큼, 의무공시 도입 일정을 미뤄야 한다는 게 기업의 주장이다. 회사 규모에 따라 ESG 공시를 위한 제3자 인증(검증), 회계 감사 비용 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23일 재계, 회계업계 등에 따르면 정부는 올해 안에 '국내 ESG 공시제도 로드맵'을 발표한다는 방침이다. 여기에는 ESG 공시 의무화 일정과 적용 기준 등이 담길 전망이다. 금융위원회는 자산 2조원 이상 기업은 2025년부터 ESG 정보를 의무적으로 공시하고, 2030년부터 유가증권 시장 전체 상장사로 확대한다는 내용을 2021년에 발표한 바 있다.
재계는 ESG 공시 의무화 시기를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는 금융위와 관계부처에 이같은 내용의 의견서를 제출했다. 다른 경제단체들도 관련 간담회나 설문조사를 통해 의무공시 도입 시기를 최소 1년 이상 연기하고, 추가로 2~3년은 책임 면제 기간으로 둬야 한다고 요구한다.
기업들은 자발적으로 ESG 공시를 하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대한상의)가 국내 100대 기업 ESG 담당 임직원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올해 8월 기준 ESG 자율공시를 하고 있는 기업은 전체 절반을 넘는 53.0%로 나왔다. 공시를 준비 중인 기업(26.0%)도 그렇지 않은 기업(21.0%)보다 많았다.
기업들은 자율공시와 의무공시는 차이가 크다고 말한다. 현재 기업이 공시하는 ESG 정보는 선택 사항이어서 사내에서 관련 데이터를 취합하고 공개하는 데 실무자들 부담이 상대적으로 덜하다. 기본적으로 통용되는 가이드라인은 있지만 보고서 채택 지침, 정보 공개 수준, 검증 정도는 회사가 알아서 판단할 수 있다.
한 재계 관계자는 "ESG 공시가 의무화가 되면 새 기준에 맞춘 데이터를 집계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만 1년 이상이 걸릴 것"이라고 했다. 그는 "설령 시스템을 구축해도 실무에 적용하려면 수많은 검수와 보완을 거쳐야 한다. 특히 환경과 관련된 비재무정보는 현업 부서를 통해 하나하나 수집해야 해 굉장히 번거롭다"고 말했다.
공시가 의무화되면 제3자 인증이나 회계 감사 등의 비용이 늘어날 것이란 우려도 있다. 제3자 인증은 기업이 제공하는 ESG 정보의 신뢰도와 투명성을 담보하기 위해 외부 전문가가 추가로 검증하는 것이다. 다만 국내외 모두 아직 제3자 인증 범위나 기준이 명확하지 않고, 전문 기관이나 인력 등 인프라도 부족한 상황이다.
다른 재계 관계자는 "제3자 인증 문제가 나중에는 회계 감사 이슈로까지 번질 수 있다"며 "회계법인과 다른 기관들이 쓰는 인증 기준이 다 다른데, 어느 쪽에서 인증을 받아야 인정을 해줄지에 대한 합의조차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