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5월 출범한 윤석열 정부는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전면 폐지하고 ‘원전 최강국’을 건설하겠다고 공언했다. 새 정부는 2018년 65%까지 추락했던 원전 가동률을 81%대까지 끌어올리고 신한울 3·4호기 건설 재개 등을 추진하며 원전 정상화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가 탈원전을 위해 심어놓은 대못 탓에 원전 산업 정상화는 예상보다 속도가 나지 않고 있다. 원전 산업 회복에 걸림돌은 무엇인지 살펴본다. [편집자주]
정부가 빈사(瀕死) 상태에 놓인 원전 생태계를 위해 납품 대금 선지급을 약속했지만, 국가계약법이 발목을 잡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행 국가계약법은 계약 이후 제품을 납품하는 당해 연도에만 납품 대금의 70%를 선지급할 수 있다.
제품을 만들어 납품하려면 원자재 구입비, 인건비 등이 필요하다. 그러나 원전 업체는 문재인 정부 5년간 수주가 사실상 끊겨 발주 물량이 늘어도 원자재 구입비 등을 마련하기가 어렵다는 불만이 나온다. 또 주기기 등 주요 기자재를 제외한 후속 기자재는 계약 이후 실제 발주까지는 3~4년이 더 걸려 이 사이에 업체가 망하지 않도록 정책 지원이 필요하다고 호소한다.
현행 국가계약법 하위규정인 기획재정부 계약예규(정부 입찰집행기준 33조)는 협력사가 제품을 납품하는 당해연도에 납품가의 70%를 선금으로 지급할 수 있도록 돼있다.
예를 들어 A 기자재 업체가 올해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과 2026년 납품 일정으로 50억원 규모의 부품공급 계약을 체결했다면 A 업체는 2026년에야 35억원을 받을 수 있다. 별도의 계약금은 없다.
원전 업체 관계자는 “과거에는 프로젝트가 많아 계약금이 없어도 그동안 번 수익으로 다음 프로젝트를 준비했다”며 “하지만 5년간 수주를 못 해 자금이 바닥난 상황이라 당장 공장을 돌릴 자금이 없다”고 말했다.
정부는 부도 위기에 내몰린 원전 생태계 복원을 위해 납품 대금 선지급, 2000억원 규모의 저금리 대출 등의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있다. 한울 3·4호기 주기기 조기 발주 등으로 두산에너빌리티(034020) 등 일부 대기업과 1차 협력사는 자금에 숨통이 트이고 있다. 하지만 2~3차 협력사는 아직 계약 단계조차 진입하지 못해 정부의 대책 마련에도 여전히 어려운 상황이다.
윤 대통령도 문제점을 알고 있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하반기 경제정책방향 관련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정권이 바뀐 지 1년이 넘었는데 경남 창원에 있는 원전 부품업체들은 아직도 빈사 상태에 놓여 있다”며 원전 업계에 대한 선제적 발주·자금 집행을 가로막는 규제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윤 대통령은 “원전 관련 업체들이 자금을 융통할 수 있게 정부가 미리 선제적으로 발주해서 제대로 돌아갈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며 “그런데 한꺼번에 발주를 많이 하거나 자금을 미리 공급하면 규정에 어긋난다는 얘기를 공무원들이 한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원전 생태계의 특수성을 고려해 국가계약법 특례 등 선금을 조기에 지급할 수 있는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면 선금 지급 시기를 납품 당해연도가 아니라 계약일로 바꾸는 식이다.
원전 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2000억원 규모의 대출을 지원하고 있지만 대출 규모가 작고 언젠가 갚아야 하는 돈이라 장기적인 지원책이 되긴 어렵다”며 “수주한 업체에 선금을 미리 지급하는 게 원전 생태계 곳곳에 자금을 수혈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