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파나마 운하가 가뭄으로 물이 부족해지자 대형 선박의 최대 허용 흘수(선박이 물에 잠기는 깊이)를 계속 낮추고 있다. 흘수를 낮추는 것은 배가 물에 덜 잠기도록 하는 것이다. 배가 물에 덜 잠기려면 선박이 가벼워져야 하고, 이는 실을 수 있는 화물의 양이 줄어든다는 뜻이다. 한국 수출기업이 미국 걸프 연안과 동안의 항만으로 보내는 컨테이너가 늘어난 만큼, 파나마 운하 문제가 장기화하면 부담이 커질 전망이다.
16일 해운업계에 따르면 프랑스 해운사 CMA CGM는 이달부터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출발해 북미로 가는 노선의 파나마 운하 할증료를 컨테이너당 300달러로 올렸다. 독일 해운사 하파그 로이드(Hapag-Lloyd)도 다음달부터 동아시아에서 북미로 가는 3개 노선에 파나마 운하 요금을 부과한다. 컨테이너당 260달러 수준이다. 다른 해운사들도 파나마 운하 관련 노선에 할증료 인상을 검토 중이다. 파나마 운하 통항에 차질이 커졌기 때문이다.
파나마 운하청은 가뭄을 이유로 최대 허용 흘수를 지난 13일부터 44피트(13.41m)로 제한했다. 이는 지난달 초보다 1피트(0.3m) 낮아진 수치다. 오는 25일부터는 43.5피트(13.26m)로 더 낮출 예정이다. 평상시 파나마 운하의 최대 허용 흘수는 50피트(15.24m)였다.
업계에서는 흘수가 0.1m 낮아질 때마다 컨테이너선의 선복량(적재능력)이 6~10%가량 떨어지는 것으로 본다. 1만5000TEU(1TEU=20피트 길이 컨테이너)급인 네오 파나맥스 컨테이너선은 최대 흘수가 44피트 이하로 내려가면 선복량이 40% 이상 줄어든다. 흘수 제한으로 컨테이너선 1척으로 나를 수 있던 화물을 2척에 나눠 실어야 한다는 의미다.
파나마 운하는 산지에 있어 물의 양에 민감하다. 파나마 운하 중앙의 가툰(Gatun) 호수는 해수면보다 26m 높다. 이에 선박들은 계단식으로 오르고 내리는 갑문을 이용한다. 선박이 갑문에 들어서면 물을 채워 더 높은 위치의 갑문으로 올라간 뒤, 운하 중앙을 지나면 다시 갑문을 통과할 때마다 물을 빼 내려가는 방식이다.
선박 1척이 파나마 운하를 지나려면 2억 3000만ℓ(흘수 50피트 기준) 이상의 물이 필요하다. 하루에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는 선박이 35척 안팎인 것을 고려하면 매일 80억ℓ 이상의 물을 사용한다. 파나마 운하는 이 물을 주변 호수와 저수지에서 끌어온다.
그러나 지난해 12월부터 가뭄이 계속되고 있어 물이 부족해졌다. 지난달에는 파나마의 강우량이 1950년 이후 최저치를 찍었다. 파나마 운하청은 가뭄 상황이 더 악화하면 하루에 운하를 통과하는 선박 수를 제한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파나마 운하가 가뭄으로 몸살을 앓는 것은 처음이 아니다. 파나마 운하청은 2019년부터 2020년까지 이어진 가뭄 때도 최대 흘수를 43피트(13.11m)로 제한했다. 물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속가능한 파나마 운하 수자원 관리 시스템 구축 프로젝트'를 진행해 신규 저수지를 조성하거나 물 재사용 설비를 도입할 계획이었으나 속도가 나지 않고 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파나마무역관은 보고서를 통해 "프로젝트 비용이 최대 35억달러(약 4조50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는데 파나마 정부 재정이 취약한 편"이라며 "2024년 5월에 대통령 선거도 예정돼 있어 당장 가시적인 진전을 보이기는 어렵다"고 전망했다.
파나마 운하 상황이 악화하면 한국 수출기업의 부담도 커진다. 특히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LA)항과 롱비치항 등 서안 항만의 노사가 1년 넘게 임금·단체협약을 두고 줄다리기를 이어가면서 항만 운영에 차질을 빚자, 수출기업은 파나마 운하를 통해 가는 미국 걸프연안이나 동안의 항만 활용을 늘려왔다.
미국 통관조사기관인 데카르트 데이터마인(Descartes Datamyne)이 미국 항만의 2019년 1분기와 올해 1분기 컨테이너 물동량을 비교한 결과, 서안 항만에서 101만4000TEU가 줄어드는 동안 걸프 연안과 동안 항만은 105만5000TEU 늘었다. 같은 기간 한국에서 걸프 연안항으로 향한 컨테이너 물동량은 80.2%(1만8000TEU) 증가했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부산에서 뉴욕으로 갈 때 파나마 운하 대신 남미를 돌아가면 20일 가까이 더 걸리고, 운항 비용도 많이 늘어 대안이 될 수 없다"며 "일단 파나마 운하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