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현지 시각) 미국 재무부가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의 전기차 세액 공제 잠정 세부 지침을 내놓자 한·중·일 배터리 업체의 무한경쟁이 시작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국이 아닌 일본이 막판에 IRA 보조금 지급 대상으로 결정되면서 일본 배터리 업체 파나소닉이 수혜를 입게 됐다.
또 중국 배터리 업체 CATL이 미국에 우회 진출하는 전략을 추진하면서 사실상 중국 업체에도 보조금이 열린 상황이다. 한국의 배터리 업체 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 기업도 모두 IRA 적용 대상이 되면서 미국 시장을 놓고 치열한 경쟁이 예상된다.
IRA 세부 지침을 보면 북미에서 만들거나 조립된 배터리 부품 50% 이상, 미국이나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국가에서 채굴하거나 가공한 핵심 광물 40% 이상을 사용하면 각각 3750달러씩 보조금을 받을 수 있다. 이 규정은 오는 18일부터 시행된다.
또 미 재무부는 부품 비율을 매년 단계적으로 상향 조정해 핵심광물은 2027년부터 80% 이상, 배터리 부품은 2029년부터 100%를 맞추도록 했다. 재무부는 배터리 부품 기준을 세분화하며 양극판·음극판은 포함하고 구성 재료인 양극활물질, 음극활물질 등은 포함하지 않기로 했다. 양극판·음극판을 만드는 구성재료는 배터리 부품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대부분의 한국 업체는 구성 재료를 국내서 생산한 뒤 이를 미국으로 보내 양극판·음극판을 생산하고 있다. 이에 따라 LG에너지솔루션(373220), SK온, 삼성SDI(006400) 등 국내 주요 배터리업체들은 모두 보조금 조건을 충족할 수 있게 됐다.
미 재무부는 핵심 광물의 경우 미국과 FTA를 체결하지 않은 국가에서 수입한 재료를 한국처럼 미국과 FTA를 맺은 국가에서 가공해도 보조금 지급 대상에 포함하기로 했다. 인도네시아나 아르헨티나 등 미국과 FTA가 없는 나라에서 수입한 광물이어도 한국에서 50% 이상 부가가치를 더하는 형태로 가공하면 보조금 기준에 충족될 수 있게 했다.
재무부는 미국과 새로 핵심광물 협정을 맺은 나라도 IRA 상 FTA 국가로 규정했다. 사실상 미국과 FTA 체결하지 않은 일본이나 유럽연합(EU)에도 한국과 같은 지위를 부여하겠다는 의미다. 일본은 협정 발표 3일 전인 지난달 28일 '상대국으로 수출하는 배터리용 핵심 광물에 수출 관세를 부과하지 않겠다'라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협정을 맺었다. 이는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과 EU 등 미국의 배터리 공급망을 한쪽에 집중하지 않고 다변화시키겠다는 전략적 의도로 풀이된다.
미국은 IRA 세액 공제 대상을 미국 생산분과 미국과 FTA를 체결한 국가로 한정했지만, 미국 전기차 제조사와 중국이 우회로 진출할 수 있는 '꼼수 협력'을 추진하면서 사실상 중국 기업도 보조금 지급 혜택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시장조사기관 SNE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중국 시장 제외) 전기차에 탑재된 배터리 용량은 219.3GWh로, 전년과 비교해 45.2% 증가했다. 공급업체별로 보면 LG에너지솔루션이 점유율 29.7%로 1위를 유지했다. 2위는 중국 CATL이 점유율 22.3%로 일본 파나소닉(17.1%)을 제치고 2위에 올랐다. SK온은 12.7%, 삼성SDI는 11%로 각각 4위, 5위에 이름을 올렸다. 국내 3사의 점유율 합계는 53.4%로 집계됐다.
중국 내수 시장에서 강점이 있던 CATL은 무섭게 점유율을 높이고 있다. CATL의 북미 점유율은 14%로 3위 수준이다. IRA에 대응하기 위해 CATL은 배터리 기술력만 제공하고, 미국 공장 지분 100%를 현지 업체가 출자하는 방식으로 협력을 추진하고 있다. 이렇게 하면 중국 배터리 업체의 기술을 적용한 전기차도 IRA 보조금을 받을 수 있게 된다.
포드는 지난달 13일(현지 시각) 미시간주에 35억달러(약 4조4647억원) 규모의 전기차 배터리 생산 공장을 건설하면서 중국의 CATL과 협력한다고 발표했다. 리사 드레이크 포드 전기차 산업화 담당 부사장은 "완전 소유 자회사를 통해 시설을 소유할 것이며, 포드가 기술 전문지식을 포함해 CATL로부터 기술을 라이선스할 것"이라고 밝혔다.
테슬라도 CATL과 미국에 배터리 공장 건설을 추진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두 회사의 협력 조건도 포드와 비슷하게 CATL이 배터리 기술을 공유하고, 배터리 생산 법인의 지분은 100% 테슬라가 가지는 조건으로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전기차 생산과 배터리 셀, 부품, 광물 등의 IRA 기준을 보면, 미국과 FTA를 체결한 한국과 미국 현지 공장 건립을 추진 중인 한국 배터리 업계에는 좋은 소식"이라면서도 "다만, 사실상 패스트 트랙을 탄 일본과 우회 투자로 IRA를 극복하려는 중국, 나아가 EU까지 미국과 광물 협정 협상을 진행하고 있어 심한 경쟁이 예상된다. 2025년부터 중국에 대한 기준이 엄격해지는 만큼 효과는 시간이 지나 봐야 알 것 같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