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뱅크(SVB) 파산 사태로 벤처업계 긴장감이 감돌고 있는 가운데, 여성 패션 플랫폼 에이블리가 벤처 대출로 500억원의 자금을 조달하면서 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벤처 대출은 벤처캐피털(VC) 등 지분 투자와 다르게 차입 방식으로 이뤄진다. 지분 희석 우려가 적어 미국 등에서 활발하다. 국내는 최근 국회가 관련 법을 통과시켜 정책자금을 통한 벤처 대출 제도화를 눈앞에 뒀다.
◇에이블리, 시리즈C 앞두고 벤처 대출로 500억원 수혈
28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에이블리를 운영하는 에이블리코퍼레이션은 최근 파인트리자산운용으로부터 500억원 자금 조달에 성공했다. 에이블리는 올해 안에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사) 달성을 위해 시리즈C 투자 유치를 이어갈 계획이다. 에이블리의 누적 투자금은 이번 벤처 대출을 포함해 2230억원이다.
보통 스타트업은 지분 인수 방식의 투자 또는 차입으로 자금을 조달한다. 차입에 해당하는 벤처 대출은 대출기관이 스타트업의 후속 투자 가능성을 보고 3~5년간 저리로 대출을 제공하되, 대출기관은 소액의 신주인수권을 취득하고 스타트업은 후속 투자 시 투자금을 상환 재원으로 활용하는 구조다.
주로 초기 투자 단계인 시리즈 A~B 단계 기업이 많이 받는다. 이들 기업은 상대적으로 후속 투자 유치 가능성이 높고 부도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그간 국내 벤처투자는 기관들의 지분투자 위주로 시장이 형성되어 왔기 때문에 벤처 대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한국벤처투자 리포트에 따르면, 벤처 대출은 VC 투자와 달리 자금 용도 제한이 적어 스타트업 입장에선 자금 유연성을 확보하기 좋은 수단으로 평가된다. 벤처 대출은 투자금을 넣는 만큼 지분을 가져가는 지분 투자와 달리 자금을 다시 상환하고, 희석률 1~2%가량의 신주만 소액으로 인수하기 때문에 창업자의 지분 희석을 최소화할 수 있다. 또 후속 투자 전까지 시간을 벌 수 있어 급히 자금을 조달하려 기업가치를 낮추는 등 불리한 조건의 투자를 받지 않아도 된다.
대출 기관 입장에선 부실 가능성이 낮은 기업에 투자하면서도, 심사 시 VC의 실사 자료를 그대로 활용할 수 있어 효율적이라는 장점이 있다. VC는 기존 주주로서 지분 희석 없이 추가 투자 비용은 낮추면서 투자사의 안정적인 성장을 도모할 수 있다.
◇美 테크기업 40%가 벤처 대출… 국내 법제화 움직임
그간 스타트업은 자금난 해소를 위해 시리즈 투자 사이사이 브릿지(bridge) 투자(중간 단계 투자)를 많이 받아왔는데, 이는 지분 희석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효율이 떨어져 이를 보완할 새 자금조달 방식 도입이 필요했다. 여기다 글로벌 투자 위축이 지속돼 자금난을 호소하는 스타트업이 늘면서 벤처 대출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벤처 대출 시장이 가장 발달한 미국에선 구글, 페이스북, 우버 등을 비롯해 테크 스타트업 40% 이상이 벤처 대출을 활용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에어비앤비는 지난 2020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로 경영 상황이 어려워지자 벤처 대출 형식으로 10억달러(약 1조3000억원)를 조달했고, 그로부터 8개월 뒤 5배가 넘는 기업가치(1000억달러·약 130조원)를 인정받아 나스닥 상장에 성공했다.
중소기업연구원에 따르면 2015년 기업공개(IPO)에 성공한 미국 스타트업 가운데 47%가 SVB로부터 벤처 대출을 받았다. 또 벤처 대출을 받은 기업의 투자 단계별 평균 지분투자 금액이 벤처 대출을 받지 않은 기업보다 더 큰 것으로 조사됐다.
국내에선 정책자금을 활용한 벤처 대출이 제도권에 진입할 전망이다. 벤처투자촉진법 개정안이 지난 21일 2년여 만에 국회 문턱을 넘었다. 개정안은 일반 은행과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 등 정책금융기관이 벤처 대출을 취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개정안은 향후 법제사법위원회와 본회의 등을 거쳐 시행될 예정이다.
한국벤처투자 벤처금융연구센터의 김선영 연구위원은 "벤처기업은 자본 투자의 보완재로서 정책자금 융자를 활용하는데 벤처 대출은 벤처기업의 성장에 유의미한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정부의 융자 지원은 특히 수익성 강화와 부채 관리 등 내실을 갖추는 데 그 효용이 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