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B, C 단계 스타트업만 찾던 벤처 캐피털(VC·벤처기업에 투자하는 기업이나 자금)이 이제는 액셀러레이터(AC)들이 투자하는 시리즈A, 심지어 프리(pre) A 단계 기업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경기 불황 국면에서 성장성이 확실하지 않은 기업에 큰돈을 투자하기가 어려우니 규모가 작은 기업으로 눈을 돌리는 모습입니다."(한 엔젤 투자자)
스타트업 투자 혹한기가 길어지면서 시리즈B, C 단계의 대규모 투자가 줄어들고 있다. 당초 펀드 관리비를 아끼고 큰 수익을 내기 위해 100억원 이상이 소요되는 투자처를 찾던 VC들도 시리즈A 단계 혹은 이전단계 기업들을 물색하는 모습이다. 시리즈A에서 B, C로 갈수록 기업가치와 투자금액이 커진다.
7일 혁신의 숲에 따르면 작년 12월부터 올해 2월까지 3개월간 프리B, 시리즈B, 시리즈C 단계 투자를 받은 기업은 43곳으로 나타났다. 전년 동기 기준 90곳의 절반이 채 안되는 수준이다. 전체 기업에서 프리B·B·C단계 투자를 받은 기업의 비중도 같은 기간 34.9%에서 27.7%로 줄었다.
통상 1000억원 이상의 펀드를 갖고 있는 VC들은 100억~200억원 단위로 투자할 기업을 투자처로 삼아왔다. 투자처 한 곳당 관리자를 2~3인씩 배치해야 하는데, 펀드를 여러 개로 나눠 다양한 기업에 투자하면 인건비 등 관리비가 증가하기 때문이다.
이런 VC에는 시리즈B 단계 이상의 투자를 노리고 있는 기업이 적절한 투자대상이다. 통상 프리 A단계나 시리즈 A단계의 스타트업은 창업 아이디어나 견본 상품을 구축하는 것이 목표라 큰 투자금이 필요하지 않다. 반면 시리즈B 단계 이상의 기업은 사업 확장을 노리고 있어 광고 및 개발 투자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경기 악화로 기업들의 시장 가치가 낮아지자 상황이 달라졌다. 이전보다 펀드 조성이 어려워졌고 적당한 가격에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낮아졌다. 이에 규모가 큰 스타트업에 투자하기보다는 금액이 적은 초기 단계 기업에 투자하려는 VC들이 늘어났다.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호황기에는 시리즈B·C단계 기업 중 투자유치를 못한 기업을 찾기 어려웠는데, 요즘에는 B, C단계 투자를 줄이고 있다"면서 "액셀러레이터(AC)들만 시리즈A 단계 이하 기업에 투자한다는 통념도 많이 흐려진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국투자파트너스도 지난해 3월 액셀러레이터를 설립해서 시드(seed·극초기 기업에 투자하는 것) 및 프리A 단계까지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작년 6월부터 현재까지 총 22개 기업에 투자했으며, 시드투자는 14건, 프리A 단계 투자는 총 8건이다.
시리즈 B, C에 주로 투자하던 에이티넘인베스트먼트도 최근 시리즈 A단계 투자 비중이 증가했다. 혁신의숲에 따르면 에이티넘인베스트먼트가 작년 4분기에 진행한 투자 7건 중 프리A 및 시리즈 A단계 투자는 총 4건이다. 같은해 1분기에 진행된 투자 11건 중 프리A·시리즈A단계 투자가 단 한 건에 불과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홍경표 혁신의숲 대표는 "1000억원대 펀드를 조성한 VC도 초기 단계 기업에 투자하는 일이 늘어났다"면서 "관리비가 늘어나는걸 감안하더라도 대규모 손실 위험을 줄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