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 발전소에서 전기를 만들고 쓸모가 없어진 사용후 핵연료(핵폐기물)의 저장시설이 가득 찰 일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이 임시방편에 불과한 저장 돌려막기로 빈축을 사고 있다. 당장 저장시설을 늘리지 않으면 조만간 원전이 멈출 수 있음에도 유권자 표를 의식한 국회가 관련 논의를 못 하고 있기 때문이다.
23일 원자력 업계에 따르면 현재 한수원은 저장시설 포화로 오갈 데가 없는 핵폐기물을 원전 부지 내에서 이리저리 옮기며 보관하고 있다. 부지 안에 여러 개 설치돼 있는 저장소 중 꽉 찬 저장소에 있는 핵폐기물을 빼 내 여유가 있는 저장소로 옮기고 있는 것이다.
앞서 지난해 말 한수원이 이사회를 열어 핵 폐기물을 운송하는 데 쓰이는 운반 용기(캐스크) 제작을 의결한 것도 부지 내 핵폐기물 돌려막기를 위한 것으로 보인다. 캐스크는 제작에만 3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되는데, 이번에 새로 만들겠다는 캐스크는 저장 포화도가 가장 심한 한빛과 한울 원전에 쓰일 예정이다.
원전 밖에 별도의 핵폐기물 저장소가 없는 한국은 원전에서 쓰고 남은 이 핵폐기물을 원전 부지 내 임시 저장장소인 습식저장소나 건식저장소에 보관한다. 습식과 건식저장소를 모두 갖춘 중수로 월성원전의 경우 사용한 핵 폐기물을 우선 습식저장소에 넣어두었다가 열이 식으면 건식저장소로 옮긴다.
경수로인 고리·한빛·한울·새울·신월성원전 등은 습식저장소만 갖고 있다. 핵폐기물을 저장하는 능력이 그만큼 떨어진다는 이야기다. 이 때문에 이들 원전에서는 핵폐기물을 가득 차 있는 저장소에서 조금이나마 여유가 있는 저장소로 '돌려막기'를 하고 있다. 원전업계 관계자는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했다.
그나마 이런 돌려막기를 할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지난해 4분기 기준 한빛과 한울원전의 저장소 포화율은 각각 77.9%, 74.7%로 앞으로 7년 뒤인 2030년이면 한빛원전이, 8년 뒤인 2031년에는 한울원전이 저장시설 포화로 원전 가동이 멈출 위기에 처해있다.
다른 원전도 포화도가 높아 임시방편으로 핵 폐기물을 보관 중이다. 원전별 포화율도 고리원전 87.6%, 월성원전 75.4%, 신월성 75.8% 등으로 높은 편이다. 고리는 2032년, 월성은 2037년, 신월성은 2042년 저장시설이 가득 차 더 이상 원전 가동을 할 수 없는 시기가 온다. 비교적 가동 시점이 늦은 새울의 경우에만 저장 포화도가 31.8%로 여유가 있다.
한수원은 현재 가장 포화도가 높은 고리원전 부지 내에 건식저장소를 추가 건설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인근 지역 주민들의 반대로 추가 저장소를 짓는 건 불투명한 상황이다. 주민들은 이미 원전으로 방사능에 대한 위험 부담이 큰데, 핵 폐기물이 부지 내에 더 쌓이는 걸 우려하는 상황이다.
결국 원전 부지 내 핵폐기물을 밖으로 빼내 별도의 저장시설에 보관해야 하는 방법이 해결책으로 제시되고 있지만, 이런 대책의 근거가 될 법안은 국회에 계류 중이다. 중간·영구 저장시설이 세워질 지역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갈등을 의식한 것으로 풀이된다.
원자력 업계 관계자는 "당장 7년 뒤부터 원전 가동이 멈출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짓는 데만 7년이 걸리는 건식저장소를 건설하는 것도 올해를 넘기면 위험할 수 있다"라며 "언제까지 핵폐기물을 돌려막기 할 수도 없는 노릇인데도, 논의가 전혀 진척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