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이 유럽판 인플레이션 감축법이라고 불리는 핵심원자재법(CRMA·Critical Raw Material Act) 도입을 추진하면서 국내 수출 업계가 긴장하고 있다. 특히 중국산 원자재 의존도가 높은 배터리(이차전지)를 중심으로 기업들의 부담이 커질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는 가운데, 일각에서는 유럽 내 점유율을 늘리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15일 업계에 따르면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오는 3월 14일 CRMA 법안을 발표할 예정이다. 핵심 광물 원자재 수급 안정을 위해 중국, 러시아에 대한 의존도를 낮춘다는 게 핵심이다. EU 역내에서 생산된 리튬, 희토류 등 원자재가 사용된 제품에 한해 세액공제와 보조금 혜택을 주는 내용이 담길 것으로 예상된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이 10일(현지 시각) 새벽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EU 정상회의 도중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AP 연합뉴스

EU는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대응하기 위해 CRMA를 준비했다. 표면적으로는 IRA처럼 중국 의존도를 낮추고 자국 산업의 이탈을 막는다는 목표다. EU는 지난 2011년부터 3년 주기로 핵심 원자재를 지정하고 있는데 2020년에 지정된 30개 중 19개 핵심 원자재 주요 수입국은 중국이다.

미국에 이어 유럽까지 보호무역주의 성격을 띠는 법안 발표를 예고하면서 수출 의존도가 높은 국내 기업들 중에서도 중국산 원자재 사용 비중이 높은 배터리 기업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지난해 대한상공회의소가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배터리 제조에 필요한 원자재 8대 품목 대중 의존도는 수입액 기준 절반을 넘는 58.7%로 집계됐다.

한국무역협회는 "미국이나 EU의 규제 강화로 중국산 원자재를 사용하는 배터리는 국제 시장에서 외면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협회는 "중국에 의존하는 배터리 공급망은 한국 배터리 생태계의 위협 요인"이라며 "리튬을 직접 채굴해서 제련하거나 공급망을 다변화하지 않으면 중국발 리스크(위험 요인)에 취약해질 수 있다"고 했다.

다만 아직 세부 내용이 발표되지 않은 만큼 부정적으로만 예상하긴 이르다는 지적도 있다. 향후 EU측과 논의를 통해 합의점을 찾아갈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EU측에 국내 기업의 차별 요소는 없어야 한다는 취지로 의견을 전달한 상태다.

조성훈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EU가 역내 핵심 원자재 비율을 30%로 끌어올린다고 하더라도, 나머지 70%는 여전히 역외에서 조달해야 한다"며 "공급망의 완전한 자율성은 장기적으로도 달성하기 어려운 과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EU는 국제협력을 통해 원자재 공급망을 확보하고자 할 것"이라며 "한국은 EU와 전략적인 파트너십을 통해 정책 불확실성을 극복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일각에선 유럽 현지에서 공장을 가동하며 공급망을 갖춰온 기업은 반사이익을 누릴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기도 한다. 일부는 폐배터리 리사이클링(재활용)처럼 CRMA 수혜가 기대되는 분야를 개척해 위험을 분산시킬 것으로 예상됐다. CRMA에는 배터리를 생산할 때 폐배터리 리사이클링을 통해 추출한 원자재가 일정 비율 이상 포함되도록 하는 내용이 담길 전망이다.

하인환 KB증권 연구원은 "폐배터리 리사이클링을 통한 원자재 조달이 정책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관련 분야의 수혜가 기대된다"며 "아직 본격적으로 개화하지 않은 분야인 만큼 정책적으로 모호한 내용들이 상당히 많은데, EU가 폐배터리 리사이클링 분야를 선도하면서 정책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