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경기 침체와 고금리·고환율이 겹치면서 대기업들이 투자를 미루고 현금을 쌓고 있다. 레고랜드 사태 이후 채권시장 경색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기업들의 단기차입금 비중도 늘어, '흑자도산'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진 데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11일 재계에 따르면 지난 9월말 기준 유가증권시장(코스피) 상장사 시가총액 상위 20곳의 현금성 자산은 250조2627억원으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지난해 말(221조9788억원)보다 28조2839억원, 지난 6월 말(247조2434억원) 대비 3조193억원 늘었다.

현금성 자산이 가장 많은 곳은 삼성전자(005930)로 3분기 현재 128조2000억원을 보유 중이다. 이는 1분기 대비 3.3% 늘어난 규모다. 삼성전자는 현금을 늘리면서도 미래사업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삼성전자는 올해 3분기까지 반도체에 29조100억원을 투자했다. 연간으로는 총 47조7000억원을 투자할 계획이어서 지난해보다 많은 투자를 단행할 계획이다.

그래픽=조선DB

SK하이닉스(000660)의 3분기 말 현금 보유액은 5조3000억원 수준으로 1분기와 큰 차이는 없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3분기부터 현금을 비축했다. 지난해 3분기와 비교하면 1년만에 현금 보유 비율이 약 60% 올랐다. 올해 '반도체 한파' 직격탄을 맞은 SK하이닉스는 내년 설비투자를 올해의 절반 수준인 10조원 안팎으로 줄이기로 했다.

SKC(011790)도 비주력 사업을 매각하고 실탄을 확보하고 있다. SKC는 지난 2일 사모펀드(PEF)에 필름사업부문인 SKC미래소재 지분 100%를 처분하고 1조5950억원의 매각대금을 일시불로 받았다. 이번에 매각한 필름사업은 SKC의 모태였다.

현대차(005380)의 현금성 자산 역시 약 26조원으로 1분기 대비 22% 늘었다. 당초 9조2000억원이었던 올해 투자 규모를 8조9000억원으로 줄였다. 기아(000270)(20조3100억원)와 현대모비스(012330)(10조9554억원)도 현금을 대규모로 확보했다.

LG(003550)그룹도 자금운용을 보수적으로 가져가고 있다. 1분기 5조6194억원이던 LG전자(066570)의 현금성 자산은 3분기에 7조5677억원으로 35.7% 증가했다. LG에너지솔루션(373220)의 현금성 자산도 연초 1조2829억원에서 3분기 말 2조1895억원으로 70.7% 증가했다. 투자보다 현금 확보에 힘을 실은 결과다.

경기 불확실성으로 기업공개(IPO)나 입수·합병(M&A)이 무산되는 사례도 늘고 있다. 홍콩계 사모펀드 운용사 베어링프라이빗에퀴티아시아(베어링PEA)는 최근 폴리이미드(PI) 필름 세계 시장 점유율 1위 기업인 PI첨단소재(178920)의 인수를 포기했다. 베어링PEA는 지난 6월 PI첨단소재 지분 54.07%를 약 1조2750억원에 인수하는 내용의 주식매매계약(SPA)을 체결했었다.

스마트폰 필름 제조사 1위 기업인 넥스플렉스의 매각 작업도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컨소시엄 측이 인수자금 마련에 실패하면서 무산됐다. 미래에셋자산운용의 서울 여의도 서울국제금융센터(IFC) 인수 작업도 매각대금(약 4조원) 모집 실패로 결렬됐다. 올해 현대엔지니어링·현대오일뱅크·SK쉴더스·원스토어·골프존커머스·밀리의서재 등 총 13곳의 기업이 IPO를 추진했다가 철회했다.

기업들은 글로벌 경기 침체와 자금시장 경색으로 성장을 위한 투자보다 생존에 무게를 두고 있다. 자산을 매각하고 투자를 유보해 위기 대응 수준을 높이는 것이다. 또 경기가 다시 회복될 경우 쌓아 둔 현금으로 M&A에 나설 수도 있다.

재계 관계자는 "하반기기 금리가 급격하게 인상된 데다 단기 차입금 비중도 대폭 늘어 자금조달 비용이 급증하고 있다"며 "현재로선 방어적인 자금 운용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