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아연(010130)이 이차전지 원료·소재 밸류 체인(Value·가치사슬)을 강화하기 위해 LG화학(051910), 한화(000880)와 함께 원자재 트레이딩 기업 트라피구라(Trafigura)와도 손을 잡은 가운데, 고려아연의 최대주주인 영풍(000670)도 트라피구라와 따로 접촉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영풍도 폐배터리 재활용 사업을 미래 먹거리로 키우고 있지만, 고려아연이 파트너십을 맺으려는 회사를 가로채려 한 것으로 보일 수 있어 고려아연의 최씨 일가와 영풍의 장씨 일가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증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25일 업계에 따르면 고려아연은 트라피구라와 니켈 제련 합작사업을 비롯한 협력 방안을 확대하는 내용의 사업 제휴를 최근 맺었다. 또 자사주 거래 방식으로 트라피구라에서만 2025억원의 투자금을 유치했다. 고려아연은 투자금을 활용해 미국 전자 폐기물 재활용기업 이그니오홀딩스(Igneo Holdings)의 잔여 지분 인수하고, 온산제련소의 퓨머(아연·연 제련 후 남은 부산물에서 유가금속을 회수하는 설비) 1기를 리사이클링 동 제련 설비로 개조하는 등 신사업 분야에 속도를 내기로 했다.

트라피구라(trafigura) 홈페이지 캡처

고려아연과 같은 대기업집단으로 묶여있는 영풍도 최근 트라피구라와 사업 협력 등을 위해 접촉한 것으로 전해졌다. 영풍도 석포제련소에 폐배터리 리사이클링 파일럿(Pilot) 공장을 가동하면서 이차전지 원료·소재 관련 사업에 공을 들이고 있다. 트라피구라는 두 회사와 만난 뒤 고려아연을 선택했다. 고려아연이 아연 생산량 기준 세계 1위 업체이고 기존에 정광 수입 등을 위해 오랜 기간 거래해왔던 영향이 큰 것으로 풀이된다.

고려아연과 영풍 모두 협력을 요청한 트라피구라는 이차전지 원료·소재 분야의 핵심 기업으로 꼽힌다. 트라피구라는 글렌코어(Glencore)에 이어 원자재 트레이딩 글로벌 2위 기업이다. 니켈과 구리 등 정제 제품 거래량만 연간 950만t 규모에 달한다. 광산은 물론 제련기업인 니어스타(Nyrstar)를 운영하고 있다. 올해 상반기 매출은 1706억달러(약 220조원), 순이익은 27억달러(약 3조5000억원)를 기록했다. 전체 매출에서 금속이나 자원 거래가 차지하는 비중이 34%가량이다.

재계에서는 고려아연과 영풍이 트라피구라를 놓고 경쟁하는 모양새가 연출된 것에 대해 최씨 일가와 장씨 일가 사이에 거리가 생긴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재계 관계자는 “LG(003550)GS(078930)의 경우 같은 그룹일 때는 물론 계열분리를 한 뒤에도 서로의 핵심 영역이나 거래를 침범하지 않는다는 암묵적 합의를 지켜오고 있다”며 “삼성이나 CJ 등 다른 회사도 대부분 이런 불문율을 지키는데, 트라피구라를 두고 영풍과 고려아연이 보인 모습은 균열이 생겼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그래픽=손민균

영풍그룹은 고(故) 장병희·최기호 창업주가 설립했다. 1974년 고려아연 출범 이후 고려아연 계열사들은 최씨 일가가, 다른 전자계열사 등은 장씨 일가가 경영해왔다. 하지만 후세로 이어지면서 분리 가능성이 지속해서 제기돼왔다. 고려아연 지분은 장씨 일가가 큰 격차로 많았으나 최씨 일가가 최근 우호 세력을 많이 확보해 지분 격차가 3.58%포인트(P)차로 줄게 됐다. 올해 들어서만 10% 이상 지분 격차를 줄였다.

지난 8월 3년 만에 고려아연 지분을 추가 매수한 장씨 일가는 최근 현금을 확보해 눈길을 끌고 있다. 장형진 영풍 고문의 자녀들이 소유한 ‘씨케이’는 지난 9월 26일부터 이달 16일까지 영풍 주식 3만9531주(2.15%)를 장내 매도해, 289억원을 확보했다. 또 장 고문의 개인 회사 ‘에이치씨’는 지난달 7일 400억원을 장 고문으로부터 무이자 차입했다. 에이치씨는 올해 3분기에 고려아연 주식 800주를 사들이며 주주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박성봉 하나증권 연구원은 “고려아연이 자사주를 전량 처분·교환하면서 최대주주(장씨)그룹과 우호지분을 포함한 2대주주(최씨)그룹간의 지분율 차이가 3%대 내외로 줄었다”며 “계열 분리에 대한 양측의 명확한 입장을 확인하기 어렵지만, 추가 지분 확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