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력(015760)의 ‘유동성 쇼크’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한전은 발전사에 전력대금을 지불하기 위해 올해 23조원이 넘는 채권을 쏟아냈는데, 최근 ‘레고랜드 사태’로 연 6%에 육박하는 금리에도 투자자의 관심을 못 받고 있다. 시장금리가 오르면서 한전채 금리가 추가로 오를 수 있어 한전의 부담은 더 커질 전망이다. 우량 등급에도 높은 금리로 채권을 마구 발행해 자금시장을 교란시킨 장본인으로 지목받는 한전이 결국 궁지에 몰리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26일 업계에 따르면 한전은 지난 25일 2년 만기 채권 2000억원과 3년 만기 2000억원에 대한 입찰을 진행했는데, 3년 만기는 최종 유찰됐다. 2년 만기 역시 목표 물량을 채우지 못하고 800억원어치를 발행하는 데 그쳤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한전채는 올 들어 지난 25일까지 23조4300억원어치 발행됐다. 이는 작년 전체 발행액(10조3200억원)의 두 배를 훌쩍 넘은 수준이다. 올해 만기가 돌아온 채권 일부는 상환했음에도 지난달 기준 누적 발행액은 52조4000억원으로 지난해 말(38조1000억원)보다 14조원 이상 늘었다.

나주 혁신도시에 있는 한국전력 본사 전경./한국전력 제공

한전이 채권을 대량으로 찍어내는 이유는 대규모 적자 때문이다. 한전은 상반기까지 14조3033억원의 영업 손실을 기록하면서 현금 유입이 끊겼다. 채권 발행 없이는 운영이 어려운 상태인데, 문제는 시장의 한전채 소화 여력이 크게 떨어졌다는 점이다.

‘AAA’ 등급을 보유해 우량 채권으로 분류되는 한전채는 연초부터 상대적으로 높은 금리를 제시하며 일반 기업의 회사채 발행을 어렵게 만든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신용등급도 높고 이자도 많이 주는 한전채로 시중 자금이 모두 쏠린 것이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연초부터 한전채 물량이 쏟아지다보니 대부분의 기관들은 한전채를 담을 만큼 담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최근 불거진 ‘레고랜드 사태’로 시장의 자금경색이 격화됐다는 점도 한전을 벼랑 끝으로 몰고 있다. 강원도의 레고랜드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채무 불이행 사태로 채권시장의 신뢰도가 바닥으로 떨어졌고, 우량 채권인 한전채마저 시장에서 외면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이재형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정부가 자금경색 해소 대책을 시행 중이지만, (자금경색) 분위기가 전환되고 있다는 신호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며 “원천적으로 자금 시장의 긴축이 가장 큰 문제다. 연 3%대에 자금을 조달해 5%대 한전채를 사면 수익이 나겠지만, 3%대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기관이 없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레고랜드 관련 충격에서 벗어나기까지는 시일이 다소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며 “그 이전까지는 이번과 같은 한전채 유찰 상황이 반복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한때 개인 투자자에게 한전채가 인기를 끌기도 했지만, 최근 저축은행이 연 6%대에 달하는 예·적금 상품을 내놓으면서 이마저도 매력이 떨어진 상황이다.

이 때문에 한전의 ‘유동성 쇼크’ 우려도 커지고 있다. 한전은 한달에 네 차례에 걸쳐 발전사에 전기를 구매하고 관련 대금을 지급해야 하는데, 채권 발행이 막히면 이 대금을 감당할 수 없다. 이에 정부는 한전이 발전사에 전력거래대금을 지급하기 어려울 경우 다음 차수로 지급을 한차례 미룰 수 있도록 관련 규칙을 개정했지만, 미뤄진다 해도 여유가 일주일가량 주어지는 데 그쳐 크게 실효성은 없다. 채권 발행을 멈추는 순간 전력을 제때 구매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기존 채무 상환 지연, 전국 인프라 운영 중단 등이 줄줄이 나타날 수 있다.

그래픽=이은현

한전채 금리가 치솟고 있다는 점 역시 부담이다. 지난 21일 한전채 3년물 금리는 5.825%를 기록하며 2008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연초까지만 해도 2%대를 나타냈는데, 3배 가까이 오른 것이다. 지난 25일 가까스로 800억원어치를 발행했던 2년물의 경우 금리가 연 5.99%로 겨우 5%대를 사수했다. 국고채 3년물과 한전채 3년물의 금리 차이(스프레드) 역시 지난달 중순부터 1%포인트(p) 이상 벌어지며 25일 기준 1.399%p까지 높아졌다. 국고채 대비 한전채 가격이 더 떨어졌다는 의미다.

한전채 금리는 물량이 쏟아질수록, 한전의 적자 규모가 커질수록 상방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한전의 재무 상황이 악화되면 투자자들은 더욱 높은 금리를 요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연초 10조원대로 거론되던 연간 적자 전망치는 최근 30조원대까지 불어났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가격 측면에서 보면 한전채는 AA급 수준”이라며 “현 상황을 보면 한전채가 아무리 AAA급이라도 6%대를 넘어설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