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케미칼(011170)이 세계 4위 동박(銅箔)업체 일진머티리얼즈를 2조7000억원에 인수한다고 밝힌 지난 11일, SKC(011790)는 동박 생산 자회사인 SK넥실리스의 정읍 5공장을 공개했다. 이곳에선 가정에서 쓰는 알루미늄 포일보다 두께가 3분의 1가량 얇은 6마이크로미터(㎛·1㎛는 1미터의 100만분의 1), 8㎛의 동박을 주로 생산한다. 손끝만 닿아도 구겨지고 찢어져 반듯하면서도 넓고 길게 감는 것이 핵심인데, 정읍 5공장은 최대 77㎞ 길이의 동박을 1.4m 폭으로 만들어낸다.
이렇게 만들어진 6t짜리 동박롤은 버튼 하나만 누르면 무인 운반차와 천장의 대형 크레인이 옮겨간다. 이같은 물류 자동화 덕분에 사람 손을 탈 일이 크게 줄었다. SK넥실리스 관계자는 "신공장에선 이전까지 구현하지 못했던 동박 생산 관련 기술이 집약된 곳"이라며 "그 덕분에 기존 공장 대비 생산성이 기계당 30~50%가량 늘었다"고 말했다.
2차전지 핵심 소재인 동박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생산하는 SK넥실리스가 말레이시아, 유럽은 물론 북미 시장에도 공격적으로 투자해 글로벌 선두 기업의 위치를 공고히 한다는 의지를 밝혔다. SKC는 롯데케미칼의 일진 머티리얼즈인수 등으로 동박 업계의 경쟁이 치열해질 것으로 예상하면서도, "(후발 주자는) 따라잡을 수 없는 갭(Gap·차이)이 있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박원철 SKC 사장과 이재홍 SK넥실리스 사장 등 SKC 임원진은 이날 전북 정읍 SK넥실리스 공장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북미 지역 투자에 대해 "미국과 캐나다 두 곳에 공장을 동시 증설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며, 4분기 내 후보지역을 확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앞서 SKC는 2025년까지 세계 최대 수준인 연산 25만t의 생산능력을 갖추기 위해 5만t 규모로 북미 지역 증설에 나서겠다고 밝힌 바 있다. 동박 1만톤은 전기차 30만~40만대를 만들 수 있는 물량이다.
작년 기준 전 세계 동박 시장 점유율은 SKC가 22%로 1위다. 2위는 중국의 왓슨(Wason·19%), 3위는 대만의 창춘(18%), 4위는 일진(13%)이다. SK㈜는 왓슨 지분 약 30%를 보유 중이다.
SKC가 북미 지역에만 두 개의 공장을 짓기로 한 것은 고객 수요에 보다 긴밀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다. SK넥실리스는 글로벌 상위 5개 배터리사를 모두 고객으로 확보하고 있다. 이 대표는 "고객들이 러스트밸트(미국 북부)와 선밸트(남부)에서 각각 생산시설을 증설 중인데, 이에 대응하기 위해선 미국과 캐나다 두 곳에 거점을 마련하는 것이 맞겠다는 판단"이라며 "(공장을 두 곳으로 늘린다 해도) 2025년까지 예상한 총 생산능력은 변동이 없지만, 향후 늘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SK넥실리스는 글로벌 동박 업체 중 처음으로 고객사와 협력해 전용 라인을 구축한다는 계획도 내놨다. 이 경우 투자가 바로 수익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이 대표의 설명이다. 고객사가 어디인지는 공개하지 않았다. SKC 관계자는 "고객사를 미리 확보해 보다 안정적으로 증설하고, 고객사는 자사 제품에 최적화한 고품질 동박을 확보해 공정 수율을 대폭 끌어올리는 '윈윈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SKC는 투자를 늘리는 계획은 유지하면서 최근 고금리·고환율·고물가 등을 고려해 전략적으로 접근한다는 방침이다. 박 대표는 "최근 필름사업 매각 등으로 마련한 자금은 동박 생산 거점의 글로벌 확장과 반도체·친환경 소재 투자에 활용할 것"이라며 "특히 친환경 소재의 경우 생분해 소재와 폐플라스틱 자원화 관련 투자를 조만간 결정할 예정이고, 내년 이후 큰 규모의 인수·합병(M&A)를 계획 중"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말레이시아나 폴란드처럼 증설을 일찍 결정해 파이낸싱해둔 부분은 (고환율 등의) 타격이 적었지만, 북미는 워낙 크게 (가격이) 올랐다"며 "증설을 단계적으로 할지, 한꺼번에 할지 고민이 있는데, 각 지역 정부의 인센티브나 캐시(현금) 지원 프로그램 등을 고려해 최대한 시간을 끌면서 막바지 협상 중"이라고 덧붙였다.
이날 SKC 임원진은 간담회 내내 SK넥실리스의 차별화된 기술 경쟁력을 강조했다. 현재 SK넥실리스는 동박 두께를 4㎛ 까지 얇게 만드는 데 성공했고, 4.5㎛ 제품을 양산할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동박은 배터리의 핵심 소재 음극재를 감싸는 얇은 구리막으로, 가격으로 따지면 전지 재료비의 5% 안팎에 해당한다.
동박은 전체 배터리 무게의 약 15%를 차지해 얇고 가벼우면서도 단단하게 만드는 기술력이 핵심이다. 동박이 얇아질수록 배터리사는 설계 공간의 여유가 생긴다. 이 대표는 "넓고 긴 제품을 우리처럼 만들 수 있는 곳은 많지 않고, 기술 격차도 커 앞으로 수요가 늘어나도 공급은 이를 따라잡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롯데케미칼이 일진머티리얼즈를 인수하며 동박 사업에 진출한 데 대해서도 SKC는 "새로운 플레이어를 환영한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박 대표는 "우리는 세계 무대에서 전쟁 중인 한국 배터리 기업들에 총알을 공급하는 역할"이라며 "빠르게 공장을 지어 고객사들이 원하는 만큼 물량을 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 롯데가 나서주면 한국 배터리 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1~2년 안에 의지만 가지고 (우리를) 따라잡기엔 격차가 있고 우리만의 숨겨진 노하우가 많다"며 "업계를 리드하는 업체로서 그 격차를 유지하면서도 업계를 적극 지원하는 책임있는 서플라이어(공급자) 역할을 지속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