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달러 환율이 1430원을 돌파하면서 급등세를 보이자 국내 산업계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과거 환율 상승은 수출 기업에 호재로 여겨졌지만, 원자재를 많이 수입해야 하는 기업은 원자재 가격이 오르기 때문에 마냥 환호할 수 없는 입장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최근 매출 500대 기업의 수출 제조기업 재무 담당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환율 상승으로 인한 원자재 수입 단가, 물류비 등 생산 비용 증가의 영향이 매출 증대 효과를 상쇄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 26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 거래일보다 22원 오른 1431.3원에 마감했다. 이날 환율은 9.7원 오른 1419원에 개장해 곧바로 1420원을 넘었는데 상승폭이 점점 커지면서 1430원을 넘겼다. 원·달러 환율이 1430원대로 올라선 것은 2009년 3월 이후 약 13년 6개월 만이다.

26일 원·달러 환율이 장중 1430원을 넘었다./연합뉴스

과거 원화 강세 국면에는 수출 기업이 큰 수혜를 입었다. 환율이 급등하면 해외 시장에서 상품을 팔 때 환율 상승분이 고스란히 이익으로 잡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국내 완성차 업체가 차 한 대를 5만달러에 판매하는 경우 원·달러 환율이 1000원일 땐 5000만원이 매출로 잡히지만, 환율이 1400원으로 뛰면 매출이 7000만원으로 늘어난다.

이 때문에 환율이 상승하면서 단기간에는 우리나라 주력 수출 품목인 반도체와 자동차, 선박 관련 업종의 수익은 급증할 것으로 예상된다. 현대차(005380)의 경우 한국산 전기차에는 보조금을 지급하지 않는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우려에도 환율 효과에 힘입어 올해 3분기 영업이익이 3조원을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현대차는 2분기에도 3조원에 육박하는 영업이익을 냈는데, 이 중 6000억원 정도가 환차익에 따른 이익으로 추정됐다.

하지만 환율 상승이 수익으로만 반영되는 것은 아니다. 원자재 수입 단가 부담이 커지면서 환차익으로 얻은 수익이 원자재 비용으로 빠져나가는 모양새다. 당장 자동차 강판으로 사용되는 냉연강판 가격이 급등세다. 상반기 원자재 가격 급등으로 자동차 강판 가격을 올렸던 국내 철강 업체는 하반기에 환율 상승을 이유로 또다시 강판 가격을 인상할 것으로 예상된다. 타이어 등 자동차에 들어가는 수입 제품 가격도 크게 뛰었다.

수입 원자재 비중이 큰 배터리의 생산 비용도 늘었다. 현대차는 실시간으로 원가 영향을 산출해 배터리 업체와 함께 배터리 원자재 선(先)매입 등으로 대응하고 있지만, 원자재 가격 상승과 함께 환율이 급등하면서 원가 부담이 커지고 있다.

석유화학, 항공, 철강 업종은 원자재 가격과 환율 동반 급등에 직격탄을 맞았다. 가뜩이나 수입 원자재의 원가 비용이 커진 상황에서 달러 강세가 지속되면서 비용 부담이 커졌기 때문이다. 대한상공회의소 조사에 따르면 기업들은 하반기 환율 불안을 기업 경영에 영향을 줄 주요 리스크 중 하나로 꼽고 있다.

냉연강판 모습./현대제철 제공

우리나라 수입 기준 결제통화는 달러가 80.1%(2021년 기준)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원·달러 환율이 상승하면 기업의 수입가격이 함께 오를 수밖에 없다. 제품 가격이 10달러로 같더라도 환율이 1000원에서 1400원으로 상승하면 실질 수입 가격은 1만원에서 1만4000원으로 상승하게 된다.

무역협회는 "생산비용 증가분을 제품 가격에 반영하지 못할 경우 영업이익(매출-비용)이 감소해 채산성이 악화되고, 생산비용 증가분을 가격에 반영하면 가격경쟁력이 떨어진다"며 "원자재 가격이 큰 폭으로 상승해도 생산 비용 증가분을 가격에 전가하는 기업은 소수에 불과해 기업 채산성이 악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무역협회가 지난해 평균 대비 올해 7월 기준으로 원자재 가격, 환율 변동의 영향으로 국내 제조업체의 생산비용이 얼마나 올랐는지 추정한 결과 11.4%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8~9월에 환율이 급등세를 보인 것을 고려하면 기업의 생산 비용 증가세는 더 클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