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역을 나와 부산항을 거쳐 차로 4㎞가량을 달리면 오래된 배들이 정박해 있는 영도구 깡깡이마을이 나온다. 배 표면에 붙은 녹, 조개류를 떼어내느라 ‘깡깡’ 망치질 소리가 울려 퍼지던 이곳은 수리 조선업을 하는 공업사들이 몰려 있다.

한때 부산에서도 경기가 좋은 곳으로 유명했지만, 조선업이 어려워지면서 소형 러시아 배 수리를 위주로 하는 군소 공업사들만 남아있다. 이마저도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 장기화로 일감이 쪼그라들면서 마을은 급격히 노후화된 모습이었다. 마을로 들어가는 좁은 길로는 자전거, 오토바이가 오가고 간간이 부품 운송 트럭이 들어갔다.

깡깡이마을로 향하는 영도 입구에는 ‘부바커(부산에서 자전거타기)’라는 이름의 관광 스타트업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부바커는 깡깡이마을 자전거 투어 상품을 운영 중이다. 한수진 부바커 대표는 “깡깡이마을은 관광객 차량이 진입하기 어렵고 주차할 공간도 없다”면서 “자전거를 타고 부산의 살아있는 산업 현장과 역사적 의미를 스토리로 풀어내는 것이 투어의 취지”라고 말했다.

부산 관광 스타트업 부바커는 배 수리 공업사들이 몰려 있는 영도 깡깡이마을 자전거 투어를 진행 중이다. /부바커 제공

부산에는 대우조선해양 기술연구소에서 자동화 시스템을 연구했던 신성일 대표가 2017년 설립한 ‘무스마’라는 사물인터넷(IoT) 시스템 스타트업도 있다. 데이터 기반으로 산업 재해를 예방하고, 디지털화, 생산성 증대를 추구하는 솔루션을 주로 부울경(부산·울산·경남) 기반의 조선소 등에 납품한다.

현재 대우조선, 현대중공업 등 부울경에서 올리는 매출이 전체의 3분의 2 정도다. 전체 직원의 80% 이상이 부산 사람이다. 서정우 무스마 이사는 “사업의 주 대상인 조선업종이 부울경에 몰려 있고, 이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직원들도 이곳에 훨씬 많기 때문에 부산을 떠날 수 없다”고 말했다.

인구 333만명, 서울에 이은 ‘제2의 도시’, ‘해양·조선·관광 중심지’인 부산이 서울·수도권에 이은 스타트업 성지로 부상하고 있다. 로컬(지역)뿐 아니라 전국 단위로 사업을 하는 곳들도 속속 나오고 있다. 부산시는 자체적으로 ‘유니콘(기업가치가 1조원이 넘는 스타트업)’을 배출하겠다는 목표로 내년 상반기에 지방자치단체 최초로 창업청을 설립해 본격 지원에 나선다. 장기적으로는 서울과의 물리적 거리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부산역 인근을 새로운 스타트업의 거점으로 육성하겠다는 계획이다.

부산에서 만난 스타트업 창업자들. 왼쪽부터 송정웅 라이브엑스 대표, 김민지 브이드림 대표, 김태진 플라시스템 대표, 이영준 모두싸인 대표. /부산=곽재순 PD, 권숙연 PD

간편 전자계약 서비스 ‘모두싸인’의 이영준 대표는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회사를 창업해 19만 기업 고객을 확보하며 전국구를 무대로 활약하고 있다. 주중에는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있는 서울지사에서, 금요일에는 다시 부산 해운대구 본사로 내려가 업무를 본다.

장애인 특화 재택근무 시스템을 개발·운영 중인 ‘브이드림’의 김민지 대표도 비슷하다. 브이드림은 아예 부산역 인근에 사무실을 두고 있다. 이들은 투자자 등으로부터 “왜 서울로 본사를 안 옮기냐”는 질문을 수시로 받으면서도 “부산의 유니콘이 되겠다”는 포부로 불편함을 감수하고 있다. 공유 미용실 ‘위닛’을 창업해 부산에서 6호점까지 낸 ‘라이브엑스’의 송정웅 대표는 서울 양천구 목동점을 시작으로 서울 진출을 본격화하고 있다. 어디에서 시작해도 전국 단위 사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부산에서 사업을 하다 보니 인재·투자난, 판로개척(매출 향상) 어려움이란 한계도 명확하다. 코리아스타트업포럼 동남권협의회가 부산 스타트업 회원사 95개사를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응답기업 중 90% 이상은 초기·후속투자가 ‘매우 어렵다’거나 ‘어렵다’고 답했다. 창업하기 좋은 환경이 아니라는 응답이 44.2%, 판로개척(매출 향상)이 어렵다는 게 88.4%,(’매우 어렵다’ 포함), 그래서 부산에서 계속 사업을 이어갈지 ‘고민 중’이라는 기업이 48.4%에 달했다.

부산을 기반으로 한 유니콘은 아직 없다. 올해 상반기 중소벤처기업부 집계에 따르면, 전체 23개 유니콘 가운데 22곳이 서울(20개사)·경기(2개사) 등 수도권에 본사를 두고 있다. 제주도에 본사를 두고 있는 쏘카(403550) 역시 서울이 실질적인 본사 기능을 하고 있어 사실상 23개 유니콘 모두 수도권 기반이다.

그래픽=손민균

부산 스타트업이 서울로 본사를 옮기거나 지사를 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영준 모두싸인 대표는 “부산에는 성공한 IT기업이 별로 없다 보니 큰 규모의 조직에서 많은 사용자를 대상으로 서비스를 직접 개발하고 운영해봤거나, 금액이 큰 제품으로 영업을 해본 경험이 있는 경력자들을 구하기가 어렵다”라고 말했다.

김태진 코리아스타트업포럼 동남권협의회 회장(플라시스템 대표)은 “부산에 좋은 일자리가 없기 때문에 이들이 서울·수도권으로 유출되고, 부산 스타트업은 인재를 구하기 위해 서울에 지사를 내서 부산 사람을 구하는 ‘웃픈(웃기면서 슬픈)’ 현실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초기 창업지원사업은 많으나 3년 이상 데스밸리(죽음의 계곡·스타트업이 자금난을 겪는 시기)를 거치는 기업에 대한 투자 환경이 열악하다”거나 “BNK금융그룹(경남은행·부산은행)처럼 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한 곳이 만든 BNK벤처투자(서울 서초구 본사)조차 수도권에서 운영 중이다. 지역 창업 생태계에 투자하는 선순환 구조가 됐으면 한다”하는 지적도 꾸준히 나온다.

박형준 부산시장은 전국 최초로 지자체 산하 창업전담기구 '부산창업청' 신설을 준비 중이다. /부산시 제공

부산시는 스타트업 생태계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부산시는 부산테크노파크, 부산경제진흥원, 부산창조경제혁신센터 등의 창업 기능을 한곳에 모은 ‘부산창업청’을 내년 상반기에 신설할 계획이다. 지방자치단체 산하에 창업 전담 행정기구가 생기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박형준 부산시장의 핵심 공약이기도 하다.

부산창업청 설립 추진단장을 맡은 성희엽 부산지역 대학연합기술지주 대표는 “벤처캐피탈(VC), 창업투자회사의 90%가 수도권에 있을 정도로 (지방은)투자 여건이 열악한 게 사실”이라며 “공공 VC를 만드는 것이 부산창업청의 첫 번째 과제”라고 말했다.

부산으로 시장을 넓히려는 수도권 기술기업도 유치한다는 목표다. 타지역 스타트업의 지사를 부산으로 유치하는 이른바 ‘모두의 부산지사’ 프로젝트를 시작해 로컬 스타트업들도 힘을 보태고 있다. 김광휘 모두의 부산지사 공동대표는 “부산은 제2의 도시인 데다 해양·관광 등에서는 강점이 있기 때문에 이쪽으로 시장을 확장하려는 수요가 있을 수 있다”며 “로컬 스타트업과 교류, 자원을 공유한다면 빠르게 정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부산역 뒤편 북항 재개발 현장을 드론으로 내려다본 모습. 영상 왼쪽으로 보이는 옥외 주차장 부지에 동남권 스타트업의 거점 역할을 할 대규모 스타트업 집적 시설이 들어설 예정이다. /부산=곽재순 PD

장기적으로 부산은 센텀시티에 이어 부산역 인근을 스타트업의 중심지로 확대해나간다는 계획이다. 부산시는 부산역 인근 북항 방향으로 도보 10분 거리에 있는 부산항 국제전시컨벤션센터의 옥외 주차장 부지에 면적 5000㎡(1513평), 지상 15층 규모의 스타트업 파크를 건립할 계획이다. 주거·쇼핑·사무시설이 있는 복합공간도 그 옆에 10층짜리로 들어설 전망이다. 부산역과 함께 국제여객, 크루즈가 오가는 국제 해양 관문으로서 북항이 미래 스타트업 핵심 기지로 제격이라는 판단에서다.

강석호 코리아스타트업포럼 동남권협의회 사무국장(마이스부산 대표)은 “센텀시티는 서울에서 KTX, SRT를 타고 부산역에서 내려 다시 차로 30~40분을 들어가야 한다”며 “고객·투자자와의 접근성이 좋은 역 인근에도 인프라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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