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강도 높은 기준금리 인상 기조를 유지하기로 하면서 세계 경제 불확실성이 커지자 국내 발행 시장에서 10년 이상 장기 회사채가 종적을 감췄다. 경기 침체 우려에 변동성도 커지며 기관 투자자들이 장기물을 외면하자 기업들이 2~5년 만기 위주로 회사채를 발행하고 있다. 그동안 회사채 10년물 시장의 '큰손'으로 통하던 보험사들도 장기물을 외면하고 있어, 기업들은 자금 조달에 더욱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우려된다.
6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SK(034730)그룹 투자전문 지주회사 SK㈜는 이날 3000억원 규모 회사채 발행을 위한 수요예측을 진행한다. SK㈜는 2년물 500억원, 3년물 1000억원, 5년물 1500억원으로 회사채를 구성했다. SK㈜는 2019년부터 회사채를 발행할 때마다 10년물을 포함시켜 차입금 만기 구조를 장기화했다. 재무상태가 안정적인 기업은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을 우려해 차입금 만기 구조를 장기화한다.
그런데 지난 6월 2년여만에 10년물을 제외하고, 3년물·5년물·7년물만 발행했다. 이번 회사채 발행에는 7년물마저 빠졌다. SK㈜는 막판까지 7년물이나 10년물 발행을 검토했으나 시장 상황에 맞게 단기물 위주로 회사채 만기 구조를 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신용등급 AA+로 최상위 등급인 SK㈜가 7년·10년물을 발행하지 않은 것은 그만큼 회사채 시장에서 장기물 수요가 없다는 의미다.
포스코에너지의 석탄발전 자회사인 삼척블루파워도 9월 15일 공모채를 2400억원 발행할 예정인 가운데 만기 구조를 2년물 1500억원, 3년물 900억원으로 구성했다. 이번에 처음으로 2년물 회사채 발행에 도전하는 것이다 삼척블루파워는 국내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이 부각되면서 2021년 이후 진행한 2차례 회사채 수요 예측에서 전량 미매각 사태를 맞았다. 삼척블루파워는 결국 2년·3년 등 단기물로 구성해 회사채 발행 재도전에 나선다.
앞서 지난달 30일 수요예측에 성공한 롯데쇼핑(023530)과 대한항공(003490)은 각각 1500억원 규모의 회사채를 발행할 예정이다. 롯데쇼핑은 ▲2년물 500억원 ▲3년물 700억원 ▲5년물 300억원으로, 대한항공은 ▲2년물 700억원 ▲3년물 800억원으로 구성했다. 모두 만기 5년 미만의 단기채 위주다. 그동안 10년물을 선호했던 SK텔레콤(017670)과 롯데케미칼(011170)도 지난달 10년물을 배제하고 회사채를 발행했다. 공기업이나 일부 금융지주사를 제외하고 올들어 10년물 회사채를 발행한 기업은 전무하다.
재계 서열 2위 SK가 10년물에 이어 7년물 회사채 발행까지 포기한 것은 그만큼 시장 불확실성이 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통화정책의 불확실성이 지속되고 있고 금리 변동성이 커지면서 기관 투자자들은 장기물 회사채 투자를 기피하고 있다.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Fed) 의장이 지난달 26일(현지시간) '잭슨홀 미팅' 연설에서 강도 높은 기준금리 인상 기조를 유지하겠다고 밝히면서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기관 투자자들의 단기채 선호 현상은 장단기 금리 차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보통 10년물 이상의 장기 채권의 금리는 단기보다 높게 형성된다. 그러나 경기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장단기 금리차가 축소되고 있다. 투자자들이 경기 전망을 어둡게 보고 단기물 투자에 집중하면서 상대적으로 인기가 없는 장기물 금리는 내려가고 단기물 금리는 올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당분간 단기물 위주의 회사채 시장이 지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동안 장기물 위주로 회사채를 발행했던 기업들은 차입 구조를 다변화할 계획이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장기물 수요가 전무해 10년물 회사채를 발행했다가 미달되면 기업 평판에 큰 타격을 입게 된다"며 "여기에 10년물 회사채 만기가 도래했을 때 단기물을 발행해 상환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금리도 가파르게 올라 회사채 발행이 망설여진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