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주유소에서 판매되는 경유가 휘발유보다 비싼 ‘가격 역전 현상’이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천연가스 가격이 급등하자 유럽이 이를 대신해 경유 소비를 늘린 탓이다. 연말 난방을 위한 전력 수요가 증가할 수밖에 없고, 이는 국제 경유 가격을 가파르게 밀어올려 국내 경유값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31일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지난 29일 기준 국내 주유소에서 판매되는 경유 가격은 리터(ℓ)당 평균 1840.79원을 기록했다. 한달 전인 지난 7월 29일(1991.04원)과 비교하면 7.5% 낮아진 것이다. 그러나 휘발유와 비교하면 하락 속도가 더딘 편이다. 같은 기간 휘발유는 ℓ당 1907.31원에서 1738.53원으로 8.8% 하락했다. 이에 경유와 휘발유의 가격 차이는 ℓ당 102.26원까지 벌어졌다.

그래픽=손민균

경유가 휘발유보다 비싼 ‘역전 현상’은 올 들어 5월 11일 처음 발생했다. 이때 역전 현상은 17일간 지속됐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두 제품의 가격 차이는 ℓ당 최대 14.65원이었다. 이후 6월 13일부터 또다시 경유 가격이 휘발유 가격을 넘어섰다. ℓ당 0.59원으로 시작한 역전 현상은 현재까지 두 달 넘게 이어지며 지난 25일부터 100원을 넘어섰다. 이번 경유 가격의 휘발유 역전 현상은 2008년 5월 이후 약 14년 만에 나타난 것인데, 당시 지속 기간은 약 3주로 짧았던 데다 가격 차이도 ℓ당 최대 9.49원에 불과했다.

경유가 휘발유 대비 좀처럼 가격 안정세를 찾지 못하는 것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천연가스 가격이 폭등하면서 그 대체제로 경유가 사용되기 때문이다. 이달 들어 EU는 천연가스 소비량을 15~20% 줄이고 있고, EU 주요 제조업체 역시 천연가스 대신 경유나 LPG를 사용 중이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천연가스 가격이 급등하자 유럽이 산업·발전용 연료 대체제로 경유를 찾고 있고, 이에 공급이 계속 부족한 상황”이라며 “반면 휘발유는 수송용으로만 쓰이기 때문에 여름 휴가가 끝난 이후부터는 수요가 많지 않아 가격이 빠르게 안정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지난 30일 기준 국제 경유가격은 배럴당 145.54달러를 기록했다. 한달 전(7월 29일 134.85달러)과 비교하면 7.9% 상승한 수준이다. 반면 국제 휘발유가격은 같은 기간 배럴당 115.36달러에서 108.56달러로 오히려 5.9% 감소했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국제 시장에서는 통상 경유가 휘발유보다 비싸긴 하지만, 그 가격차는 5달러 안팎이었다”며 “지금은 40달러 가까이 벌어진 상황”이라고 말했다.

경유에 부과되는 유류세가 휘발유 대비 상대적으로 덜 인하됐다는 점도 역전 현상의 한 요인이다. 국내에서는 국제 시장과 반대로 경유가 휘발유보다 저렴한 편이었는데, 이는 휘발유에 붙는 세금이 ℓ당 820원(부가가치세 10% 포함)으로 경유(581원)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현재 정부는 법정 최대 한도인 37%까지 유류세를 인하하고 있는데, 같은 비율로 유류세를 낮추면 인하 혜택은 휘발유에 더 많이 돌아갈 수밖에 없다.

국제 천연가스 가격이 한동안 고공행진을 보일 것으로 전망되면서 경유 가격의 안정화 역시 올해까지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관측이 나온다. 특히 현재까지는 국내 경유 가격이 느리게나마 떨어지고 있었는데, 국제 가격이 오르고 있는 만큼 조만간 상승세로 전환할 것으로 보인다. 국제 가격이 국내에 반영되기까지는 2~3주가량 소요된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올 겨울 유럽 각국의 에너지 대란이 심화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며 “경유 가격은 가스가격과 연동되다시피 할 것으로 보여 획기적 대책이 나오지 않는 한 높은 수준을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