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사회 비주류인 아시아계 출신으로 아이비리그 명문 프린스턴대를 거쳐 하버드대 경영대학원(MBA)을 중퇴한 뒤 2013년 창업에 뛰어든 팀 황(Tim Hwang·30)은 최근 한·미 투자업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람 중 한명이다. 그가 만든 ‘피스컬노트(FiscalNote)’는 이달 1일 미국 증시에 성공적으로 상장했다. 현재 시가총액은 약 1조6000억원이다.
고등학교 시절이던 16세 때 버락 오바마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 선거캠프에서 일했고, 이듬해 메릴랜드주 몽고메리카운티 학생 교육위원에 투표로 선출되는 등 ‘정치 유망주’로 꼽히기도 한다.
최근 뉴욕증시에 상장한 피스컬노트는 정부, 의회, 법원 등의 정책, 법, 규제 등의 정보를 인공지능(AI)·빅데이터 기술로 수집·분석해 전 세계 5000여개 기업, 공공기관, 로펌, 비정부기구(NGO) 등에 서비스한다. 최근 실적 발표에 따르면, 2분기(4~6월)에 2720만달러(약 363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1% 증가했다.
지난 23일(현지 시각)에는 황 대표가 올 초 또 다른 핀테크(금융+IT) 스타트업인 ‘니트라(Nitra)’를 설립했고, 첫 투자에서 6200만달러(약 827억원)를 유치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투자자 명단에는 벤처캐피탈(VC) 거물인 안드레센 호로위츠(Andreessen Horowitz), 뉴 엔터프라이즈 어소시에이츠(NEA), 판테라 캐피탈, 야후 창업자인 제리 양이 이끄는 AME벤처스, 영화배우 윌 스미스의 ‘드리머스VC’ 등이 이름을 올렸다. 한국에선 KB금융(105560)그룹이 주요 투자자에 포함됐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있는 조선 팰리스에서 황 대표와 만났다. 그는 “정치에 관심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현재로선 사회를 바꾸기엔 정치보다 스타트업이 효과적”이라면서 “한국과 미국을 잇는 다리 역할에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한국계이지만 미국에서 태어나 쭉 자랐다.
“1980년대에 부모님이 미국 중부에 있는 미시간주로 이민 왔다. 당시 한국의 불안한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공무원이었고 특별히 부유한 가정은 아니었다. 영어도 못 했는데 아시아 사람도 없는 동네에 가서 고생이 정말 많았다고 한다. 1992년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집에서는 한국말로 대화하고 한국 음식을 먹고 한국 TV 프로그램을 보며 자랐다. 한국 가정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부모님과는 충돌이 많았다. 부모님의 모든 판단 근거는 1970~1980년대 한국 사회에서의 경험에 기반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미국에서 현대사회라 할 수 있는 1990년대 초에 태어나 2000년대 학창 시절을 보냈다. 부모님은 내가 변호사가 되길 진심으로 바라셨는데 정치인이 되고 싶다고 하니 반대가 극심했다. 한국 정치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 때문이다. 나는 미국 정치인들의 대중연설을 보고 많은 이들의 삶에 영감을 주는 것을 보며 자랐다.”
-정치의 길을 가지 않고 창업한 이유는.
“2010년 들어 정치 상황은 매우 안 좋은 방향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나는 변화하는 사회를 만들고 싶었는데, (정치가 아닌) 스타트업이 답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헬스케어든 교육이든 환경이든 교통이든 무엇이든 내가 변화를 만들고 싶은 때 많은 젊은이들은 이 분야에서 어떻게 창업할지 고민한다. 나 역시 그런 식으로 진로를 틀었다. 어머니는 정치하겠다고 할 때보다 더 화냈다.”
-사업적으론 탄탄대로를 달려온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학창 시절 정계 경험을 하고 프린스턴대를 나왔다는 점 때문에 거대한 네트워크를 갖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정반대였다. 부모님은 영어는커녕 아무런 비즈니스 네트워크도 없이 미국에 왔다. (비주류에 아무런 기반도 없는) 내가 좋은 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정말 열심히 공부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대학 졸업 후 창업을 결심한 뒤 실리콘밸리에 처음 갔던 21~22살 때 역시 아는 사람도, 아는 투자자도, 아는 스타트업 창업자도 없었다. 아파트 구할 돈이 없어 모텔 방에서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16시간씩 일했다. 네트워크를 마련하기 위해 구글링하며 이벤트를 찾아 헤맸고, 명함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밤새워 일하고의 반복이었다. 이런 노력들이 투자자들에게 좋게 보였다고 생각한다.”
-자율주행, 암호화폐처럼 새로운 기술이 나오고, 이런 사업을 하는 기업이 늘면서 규제를 이해하고 예측하는 어려움도 점점 더 커지고 있다.
“글로벌화가 가속화하면서 삼성전자(005930), SK(034730), LG전자(066570), 스타벅스, 맥도날드, 아마존, 애플 같은 글로벌 기업들이 서로 다른 국가에서 더 많은 규제 대상이 되고 있다. 사업을 매우 빠르게 확장한 구글 역시 한국, 호주, 미국, 유럽에서 독점 등의 이유로 소송 중이지 않나. 우크라이나, 대만, 북한, 아프리카 일부 개발도상국 등 지정학적 위험도 커지고 있다. 이런 상황은 신산업을 영위하는 기업에 규제 불확실성을 야기한다. 각국 규제 정보를 제공해 국가별 진출 전략을 예측하도록 도와주는 피스컬노트에는 큰 사업적 기회다.”
-코로나19로 인한 변화도 있을까.
“지난 2~3년간 각국 정부가 경제를 직접적으로 통제하는 수준은 정점을 찍었다고 생각한다. 정부는 사업장을 폐쇄하고 유동성을 공급했으며 세금 체계를 바꾸기도 했다. 전 세계적으로 정부가 공중 보건에 대한 많은 통제권을 행사했고, 이는 경제에도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다. 이런 환경에서 기업들은 당연히 정부가 어떤 조치를 취하고 있는지 면밀히 살펴야 한다.”
-한국은 새 정부 들어 규제 개혁에 의지를 보이고 있다.
“한국의 경제 개발 과정을 떠올려보면, 지금은 대기업으로 불리는 회사도 이를 세운 창업가들의 고된 노력이 있었다. 설탕가게든 자동차 정비소든 훌륭한 아이디어를 갖고 열심히 일한다면 한국에서 회사를 세워 성공하는 게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걸 우린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이른바 ‘코리안 드림’이라는 걸 한국도 적극적으로 장려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실패해도 괜찮다’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또 글로벌 파트너, 투자자, 직원들을 유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최근 피스컬노트가 한국 경제 데이터 회사인 에이셀테크놀로지스의 인수·합병(M&A)을 마무리 짓는 데 1년 반이 넘게 걸렸다. 한국은 ‘자금 조달이 가장 어려운 나라’라는 생각이 투자 유치 때마다 든다. 이를 우호적으로 바꿔나갈 필요가 있다.”
-최근 상장했는데 사업 확장 계획은.
“에이셀테크놀로지스는 한국 경제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데이터를 수집하는 곳이다. 한국 사람들이 어떤 브랜드 제품을 사고 어느 매장을 방문하는지 말이다. 신한카드, KT(030200)가 파트너다. 이를 통해 데이터를 경제·시장으로 확장하려고 한다. 환경·사회·지배구조(ESG) 역시 관심이 있다. 탄소 관리·처리, 물 관리, 온실가스 관리가 정말 중요해지고 있다. 아마도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사업적 기회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핀테크 분야의 니트라도 창업했다.
“니트라 공동 창업자이자 최대 투자자이고,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다. 니트라는 헬스케어를 위한 디지털 은행이다. 미국 의료시장은 45조달러(약 6경7조5000억원)로 한국 전체 국내총생산(GDP)의 2~3배 되는 규모다. 여기에 초점을 맞춘 은행을 만들 수 있다면 KB금융·신한금융그룹보다 2~3배 더 큰 사업을 벌일 수 있다. 우선 미국 내 약 60만개 병원에 법인 신용카드를 발급하는 것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또 이들이 신용카드로 무얼 사는지 모니터링하고 있다. 최근 사업을 대출로 확장하고 있다. 내년부터는 아마존이나 쿠팡처럼 물류센터를 만드는 게 목표다. 의약품, 수술·의료기기 배송에 뛰어들기 위해서다. 이를 위한 온라인 마켓 구축을 위해 의료기기 공급업체, 제약사 등과 손잡고 있다. 내년에 첫번째 유통센터 오픈을 계획 중이다.”
-향후 정치인이 최종 목표인가.
“정치에 관심이 매우 많은 건 사실이지만 정치가 해야 할 일이 있고, 민간이 해야 할 일이 있다. 현재로선 빠른 의사결정, 이를 통한 혁신적인 변화로 사람들의 삶을 움직일 수 있는 최선이 스타트업이라 생각한다. 예외적으로 한국 창업자, 정치인을 미국 시장과 연결해주는 다리 역할을 하는 데는 관심이 많다.
사업 환경 예측이 어려운 중국보다 미국이 더 중요한 경제 파트너라는 점을 한국 기업인들은 명심해야 한다. 물론 논쟁의 여지가 있을 것으로 알고 있다. 한국은 비교적 현대적이면서 세계적인 자본시장, 법, 규제 환경을 갖고 있는 만큼 아시아의 허브가 될 만하다. 미국 기업들도 아시아의 거점으로서 한국을 보다 면밀히 살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