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주목받던 바이오산업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뜨거웠던 기업공개(IPO) 열풍은 검증을 철저히 하려는 분위기와 함께 찬바람이 불고 있고 급증하던 바이오·의료 벤처 투자 규모 역시 주춤하고 있다.
그러나 바이오산업 인프라가 잘 갖춰진 바이오 클러스터는 검증된 바이오 벤처 산업을 일으킬 여건을 제공한다. 정부 역시 제약·바이오 기업에 투자하는 5000억 원 규모의 민간 합동 ‘K-바이오·백신 펀드’를 조성하고, 각종 세액지원을 아끼지 않을 예정이다. ‘이코노미조선’은 혹한기 속 바이오산업의 돌파구가 될 수 있는 바이오 클러스터의 성공 열쇠를 취재했다. [편집자주]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에 있는 에이스광교타워2차 15층. 8월 17일 이곳에 최대 4000여 마리의 소형 설치류를 수용할 수 있는 플랫바이오의 실험동물센터가 들어선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같은 부위에 치료 후보물질을 주입해 실험할 수 있는 동소이식 동물 실험이 가능한 시설로, 광교·판교 바이오 클러스터 생태계가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곳뿐 아니라 국내에는 이미 20여 곳에 바이오 클러스터가 조성되고 있다. 경기도 광교⋅판교나 서울 홍릉 메디클러스터, 인천 송도 바이오혁신클러스터처럼 지자체 주도형이 있고, 대전 대덕과 강원 원주처럼 자생형, 오송과 대구에 10여 년 전부터 조성된 첨단의료복합단지 같은 중앙정부 주도형까지, 숫자만 보면 바이오 클러스터가 급증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문패만 ‘바이오 클러스터’를 내건 단지도 적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바이오산업은 일반 제조업과 달리 후보물질 탐색부터 실제 상용화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 수많은 단계를 거치면서 필요한 자원(자금 및 실험 시설 등)이 적지 않게 든다. 이러한 과정에 걸맞은 인프라 환경이 갖춰지지 않았는데도 관련 기업이 몰려 있다는 이유로 ‘바이오 클러스터’를 내건 곳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에 우후죽순 조성되는 바이오 클러스터가 혹한기에 빠진 바이오산업의 돌파구가 될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린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바이오·의료 벤처 투자 규모는 2020년 상반기 4311억원에서 2021년 상반기 8145억원으로 두 배가량 늘었다가 올해 상반기 6758억원으로 뒷걸음질했다. 바이오 기업공개(IPO) 열풍이 꺾인 것과 무관치 않다.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으로 바이오산업의 가치와 중요성이 더욱 부각됐지만 되레 이 산업에 찬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다.
혹한기는 혹독한 검증을 요구하는 분위기로 이어지고 있다. 바이오 업계 관계자는 “두어 마리로 동물 실험을 하거나 10명도 안 되는 환자를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을 검증된 것처럼 포장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과거보다 검증을 철저히 하려는 투자자가 늘고 있다”고 전했다. 바이오산업 인프라가 잘 갖춰진 바이오 클러스터는 검증된 바이오 벤처를 탄생시킬 여건을 제공한다. ‘이코노미조선’이 혹한기 속 바이오산업의 돌파구가 될 수 있는 바이오 클러스터를 조명한 이유다.
정부는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는 상태다. 윤석열 대통령은 7월 27일 분당서울대학교병원 내 헬스케어혁신파크를 찾아 “바이오 헬스 산업은 성장 잠재력이 매우 높은 유망 산업으로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끄는 핵심 분야”라며 “우리도 미국의 보스턴 바이오 클러스터같이 성공적인 바이오 클러스터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바이오 혁신 성지가 된 美 보스턴 바이오 클러스터
미국의 매사추세츠주에 있는 보스턴 바이오 클러스터는 1977년 미국 케임브리지 시의회의 DNA 재조합 실험 합법화가 출발점이 됐다. 주정부의 전폭적인 규제 완화 및 자금 지원 아래 매사추세츠공과대(MIT)와 하버드대 출신 유능한 인재가 모여 벤처 기업을 만들기 시작했고, 로슈·화이자·노바티스 같은 글로벌 빅파마와 벤처캐피털(VC)의 전략적 투자가 연결고리를 만들면서 바이오 벤처가 데스밸리(Death Valley)를 무사히 건널 수 있도록 돕는 인적·물적 네트워크가 더욱 단단해지고 있다. 1000개가 넘는 바이오 기업과 연구소, 병원, 대학이 생태계를 함께 형성하고 있다. 미국 바이오 매체인 GEN이 2015년부터 매년 선정하는 미국 바이오 클러스터 순위에서 이곳은 1위를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보스턴 바이오 클러스터 인프라의 한 축을 맡고 있는 랩센트럴의 마이크 라렛 최고브랜드경영자(CBO)는 “입주자, 후원자 및 파트너 그리고 랩센트럴 내·외부 커뮤니티가 협력할 수밖에 없는 신뢰도 높은 비즈니스 모델을 운영하고 있다”고 전했다.
정부·지자체·민간까지 뛰어든 K바이오 클러스터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지난 7월 인천과 송도에 있는 산업시설용지 35만7366㎡를 4260억원에 매입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1~3공장이 있고, 내년 6월 가동 목표로 한창 건설 중인 4공장이 소재한 송도 1캠퍼스에 이어 2캠퍼스가 들어설 곳이다. SK바이오사이언스도 3000억원가량을 투자해 송도에 2024년까지 3만㎡ 규모 연구·공정개발(R&D)센터를 신축할 계획이다. 송도는 셀트리온, 삼성바이오로직스 등이 글로벌 수준의 위탁생산 거점을 갖춘 곳으로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및 인천시 등과 협력해 바이오 클러스터 확장에 속도를 내고 있다.
하지만 국내 바이오 클러스터의 경우 여러 부처와 지자체가 통일된 청사진 없이 경쟁적으로 달려들어 입주 기업 모집이나 정부 예산 확보에 치중하고 있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특히 바이오 클러스터 구성 요소인 산·학·연·병 등 다수 주체의 공동 참여가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주체가 연결된 바이오 클러스터는 사실상 전무한 상황이다.
김대중 정부(벤처 기업 육성), 노무현 정부(바이오산업 및 지역 균형 발전 동시 추진), 이명박 정부(정부 주도 바이오 클러스터 선정), 박근혜 정부(병원 중심 메디클러스터 추가) 등 특정 키워드를 중심으로 막대한 투자가 이뤄진 결과, 전국 15개 시·도에 △정부 주도형(오송, 대구)△지자체 주도형(홍릉, 송도, 광교·판교) △자생형(대덕·원주) 등 지역 거점별 바이오 클러스터가 봇물 터지듯 들어섰다.
규제 완화로 한국판 보스턴 바이오 클러스터 만들어야
국내에서 중앙 부처 차원의 바이오 클러스터 정책을 통해 조성된 곳은 사실상 오송과 대구(첨단의료복합단지)뿐이다. 각개전투식으로 생겨나는 여러 지역을 아우르는 종합적인 육성 계획은 없다. 때문에 클러스터별 차별화를 위해 백신 등 특정 부문별로 특화된 클러스터로 키우거나, 바이오 기업의 성장 단계별로 입주 여건이 다른 클러스터를 조성하는 등 차별화 노력이 필요하다는 주문이 이어진다.
무엇보다 정부 부처 간 협업이 중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바이오 연구 역량을 갖춘 정부 주도형 바이오 클러스터임에도 바이오산업 분야 규제자유특구에서 배제된 오송이 대표적 사례다. 중소벤처기업부는 2019년 바이오 분야 규제자유특구를 대전·강원·대구로 지정하면서, 오송을 제외해 지역 주력 산업과 연계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지적을 받았다. 인근 클러스터와 연계를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상원 성균관대 약대 교수는 “전국을 몇 개의 큰 광역 클러스터로 묶어 거리상 가까운 인근 바이오 클러스터 간 협력을 유도하면 시너지 효과를 높일 수 있다고 본다”고 했다.
이 밖에 다수의 바이오 클러스터가 공동으로 육성할 수 있는 고급 전문인력 양성 및 연구개발 연계 시스템을 구축하고 인프라 시설과 전문 연구 장비를 공동 활용할 수 있는 연결고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보스턴 바이오 클러스터가 규제 완화를 출발점으로 삼았듯 윤석열 정부의 바이오 특화 규제샌드박스 기조를 디딤돌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정부는 백신 주권 확보와 신약 개발을 위해 올해 5000억원 규모의 K바이오·백신 펀드를 조성하며 2026년까지 13조원 규모의 민간 투자도 도모한다. 조용래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현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바이오 특화 규제샌드박스가 국내 바이오 클러스터 성장의 디딤돌로 작용하도록 정책적인 유도가 필요하다”면서 “다양한 분야 전문가와 인재를 유입시키는 오픈 이노베이션(기업이 외부의 기술 자원을 활용해 혁신하는 전략) 모델의 시발점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전효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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