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전지 핵심 소재 중 하나인 동박(전지박)을 만드는 일진머티리얼즈가 시장에 매물로 나오자 롯데, LG(003550) 등 주요 대기업과 대형 사모펀드(PEF) 운용사들이 즉각 인수 검토에 착수했다. 전기차 시장이 급성장하는 만큼 동박 수요의 폭증은 정해진 미래이지만, 조 단위 현금을 투입해 생산능력을 계속 키워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점이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유력 후보 중 하나로 꼽혔던 포스코도 불참을 선언하면서 흥행이 쉽지 않을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12일 업계에 따르면 일진그룹은 일진머티리얼즈 지분 53.3%를 매각하기로 하고 최근 매수 후보자들에게 티저레터(투자안내문)을 발송했다. 롯데케미칼(011170)과 LG화학(051910) 등 대기업과 MBK파트너스, 한앤컴퍼니 등 대형 PEF가 티저레터를 받아간 것으로 전해졌다. 일진그룹은 오는 8월 중 본입찰을 실시한다는 계획이다. 매각가는 현재 시가총액(3조8600억원)과 경영권 프리미엄 등을 고려해 3조원 안팎으로 거론되고 있다.
동박은 배터리 핵심소재인 음극재를 감싸는 얇은 구리막이다. 과거엔 전자·전기제품의 핵심 부품인 인쇄회로기판(PCB) 제조에 주로 쓰였지만 전기차 시장 성장에 따라 2차전지용 동박 수요가 크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통상 전기차 한 대당 40kg가량의 동박이 필요하다. 시장조사기관 SNE리서치는 전 세계 동박 수요가 올해 26만5000톤(t)에서 2025년 74만8000t으로 연평균 40% 이상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일진머티리얼즈는 2019년 이후 세계 시장 점유율을 공개하지 않고 있지만, 업계에서는 SK넥실리스(22%), 왓슨(중국·19%), 창춘(대만·18%)에 이어 13% 안팎을 차지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업 성장성이 확실한 만큼 일진머티리얼즈에 눈독을 들이는 기업은 많지만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분위기도 형성되고 있다. 인수 이후에도 대규모 투자가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동박업계 관계자는 "동박은 결국 장치산업이라 조 단위 자금이 계속 투입돼야 한다"며 "전기차 시대가 이제 막 시작된 만큼 동박 업계도 생산능력을 경쟁적으로 늘리고 있고, 공장을 지은 뒤에도 한동안 자금 소요가 계속돼 대주주의 현금 창출력과 사업에 대한 의지가 중요한 분야"라고 말했다.
국내 동박업계는 전기차 시장 성장세에 맞춰 생산능력을 키우기 위해 자금 투입에 속도를 내고 있다. 통상 동박 1만톤(t)을 생산하는 데 1500억원 안팎이 필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SK넥실리스는 작년 말레이시아 공장(5만t)과 폴란드 공장(5만t)을 짓는 데 각각 7000억원, 9000억원을 썼다. SK넥실리스는 현재 국내 5만t 규모의 생산능력을 2025년까지 국내외를 합쳐 25만t까지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SK넥실리스의 모회사인 SKC(011790)가 작년 산업은행과 1조5000억원의 금융협약을 맺은 것도 동박 투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또다른 동박업체인 솔루스첨단소재(336370) 역시 유럽부흥개발은행(EBRD)로부터 2800만달러(약 350억원)를 차입하고 유상증자를 통해 2400억원을 확보했다.
일진머티리얼즈 역시 생산능력을 확대해야 한다. 일진머티리얼즈는 현재 익산공장 2만t, 말레이시아 공장 2만t 등 총 4만t의 동박 생산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조만간 말레이시아 공장이 4만t으로 늘어나는데, 이를 포함해 2025년까지 20만t 이상 생산능력을 확보하는 것이 목표다.
일진머티리얼즈는 작년 말 사모펀드 스틱인베스트먼트로부터 1조원 투자를 유치하고 1500억원 규모의 전환사채를 발행했지만, 향후 미국 진출 계획 등을 고려하면 여전히 자금이 목마른 상황이다. 동박업계 관계자는 "일진그룹이 일진머티리얼즈를 매각하는 이유 중 하나가 투자비 부담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고 전했다.
투입하는 자금에 비해 당장 현금이 크게 들어오지 않는다는 점도 매수 부담을 키우는 요인이다. KB증권은 올해 SK넥실리스의 동박사업 매출과 영업이익이 각각 9707억원, 1142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50% 가까이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성장세는 높지만 아직 그 규모가 크지 않은 상황이다. 솔루스첨단소재의 경우 올해 1분기 매출이 1236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40% 가까이 늘어났지만 24억원의 적자를 냈다. 헝가리 공장이 본격 가동을 시작하자 이로 인한 고정비가 증가하면서 작년 4분기부터 적자를 이어가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최근 포스코가 일진머티리얼즈 인수전에 불참한다는 의사를 밝히는 등 인수 후보자가 많지 않은 상황"이라며 "단기간내 기업가치를 키워 다시 매각해야 하는 사모펀드는 물론 기존 사업과 시너지를 위해 인수를 검토하는 기업 입장에서도 늘어나는 투자비를 감당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