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년 전 공사가 중단된 필리핀 바탄(Bataan) 원자력 발전소 재개 사업을 한국이 수주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이 원전은 1976년 미국 웨스팅하우스가 건설하던 발전소였으나, 미국 원전 사고 여파로 공사가 중단됐다. 필리핀은 바탄 원전 공사 재개를 시작으로 대규모 원전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이달 30일 취임 예정인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 당선인도 원전 가동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3일 원전 업계에 따르면 필리핀 정부는 석탄 화력발전의 단계적인 폐쇄 및 원전 사업 재개를 국가 에너지 정책에 포함하는 행정 명령을 최근 승인했다. 현지 에너지 당국은 필리핀 원전 부활의 첫 사업으로 바탄 원전 공사 재개를 추진하기로 했다. 앞서 한국수력원자력은 2019년 바탄 원전 재개 사업 수주를 위해 예비타당성 조사 결과를 필리핀 에너지부에 제출했었다.
필리핀 원자력 사업을 담당하는 카를로 아실라(Carlo Arcilla) 원자력연구소(PNRI) 소장은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원자력 발전 도입 가속화를 위해 바탄 원전 발전소 부활이 필요하다”며 “한국이 제안한 바탄 원전 사업 재개 투자와 관련해 2년 내 투자비 회수가 가능하다”고 밝혔다.
러시아도 바탄 원전 재개 사업에 공을 들이고 있다. 러시아 국영 원전기업인 로사톰은 필리핀에 전문가 20여명을 파견해 바탄 원전 재개 타당성 조사를 실시했다. 당시 로사톰은 공사 재개 및 수리 등에 필요한 금액을 필리핀 당국에 제시했다. 한수원은 로사톰이 제안한 금액보다 낮은 투자금을 제출한 것으로 전해진다.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러시아 기업들이 서방국가의 경제 제재 대상에 오르면서 한국이 수주전에서 앞서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수원도 사업 수주를 위해 현지 정부와 끊임없이 접촉해왔다. 2018년 6월 알폰소 쿠시 필리핀 에너지부 장관과 도나토 마르코스 차관 등 에너지부 대표단이 부산 기장군에 위치한 고리2호기를 방문하기도 했다. 당시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이 바탄 원전 재개 사업 수주의 최대 걸림돌이라는 지적이 많았으나, 윤석열 정부가 탈원전 정책을 폐기하면서 장애물이 제거된 상황이다.
바탄 원전은 미국 웨스팅하우스가 필리핀 루손섬 남부에 지으려고 했던 발전소다. 1976년 건설을 시작한 지 3년 만에 미국에서 스리마일 원전 사고가 발생하며 공사가 중단됐다. 1981년 1월 공사가 재개돼 공정률이 98%까지 도달했으나, 원전 사업을 추진했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당시 대통령이 축출되며 다시 공사가 연기됐다.
필리핀 정부는 기후 정책 및 에너지 위기 대응을 위해 석탄 화력발전소를 단계적으로 폐쇄하고, 원전을 비롯한 대체 에너지 개발을 통해 전력난을 해소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이 바탄 원전 재개 사업을 수주할 경우 필리핀과 소형모듈원전(SMR) 협업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필리핀 정부는 7000여개의 섬으로 이뤄진 지리적 특성상 대형 원전보다는 지역별 SMR 건설을 원하고 있다. 앞서 한수원도 2019년 예비타당성 조사 결과를 제출하면서 SMR 협업 의사를 전달했다고 한다.
원전 업계 관계자는 “바탄 원전 재개 사업을 수주할 경우 SMR 사업까지 패키지로 계약을 체결할 수도 있다”며 “필리핀 정부가 조만간 바탄 원전 재개 사업자를 선정할 것으로 보이는데, 윤석열 정부의 첫 원전 수주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