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경영판단의 원칙을 인정한 사례가 10건 중 4건에 불과하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경영판단의 원칙이란 기업 임원이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재량 범위 내에서 한 행위라면 문제가 생겨도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이다. 경영판단의 원칙을 명문화해 배임죄 부담을 완화하고 예측가능한 사법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은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에게 의뢰해 2011년부터 작년까지 10년간 경영판단원칙을 다룬 대법원 판결 분석 결과를 29일 공개했다.
경영판단원칙이란 이사가 선량한 관리자로서의 의무를 다하고(선관의무) 이사의 재량범위 내에서 행위를 했다면 비록 회사에 손해가 발생해도 개인적 책임을 부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영판단의 원칙은 민사에서 이사의 손해배상 책임을 따지는 기준이 되고, 형사에서는 이사의 횡령·배임죄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경영판단의 원칙을 다룬 대법원 판례는 지난 10년간 총 89건(민사 33건, 형사 56건)이었는데, 경영판단의 원칙을 인정한 재판은 34건(38.2%)에 그쳤고 부인(否認)한 재판은 55건(61.8%)이었다.
형사재판 56건의 경우 경영판단원칙을 부인하는 비중은 더 높았다. 경영판단의 원칙 부인으로 최종 유죄판결이 난 재판은 42건(75%)으로 인정(무죄) 14건(25%)보다 3배 많았다.
특히 계열사 지원에 따른 이사의 횡령·배임 여부를 다룬 7건의 재판 중 단 1건만 경영판단원칙을 인정해 무죄로 판결했다. 전경련은 "기업 경영상의 문제가 형사소송으로 비화될 경우 대법원이 경영판단의 원칙을 인정하는데 매우 엄격하다는 것이 확인된다"고 해석했다.
민사재판의 경우 경영판단원칙 인정(20건, 60.6%)이 부인(13건, 39.4%)보다 높았는데, 이에 대해 전경련은 "이사 재량범위 밖이거나(9건) 명백한 법령위반(4건)이 아니면 경영판단의 원칙을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전경련은 법원이 경영판단의 원칙 적용에 엄격할 뿐만 아니라, 판결에서도 일관성을 찾기 힘들어 경영 일선의 혼란을 가중시킨다고 봤다. 전경련은 "그룹내 부실 계열사에 대한 지급 보증이 배임죄로 문제가 될 경우, 법원은 경영판단의 원칙을 인용해 무죄로 판결하기도 하고 회사에 손해를 끼칠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경영판단원칙을 부인하기도 했다"며 "결국 기업들은 배임죄 처벌 위험과 법원의 비일관된 경영판단의 원칙 적용으로 이중고를 겪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반면 미국 법원은 배임죄가 없을 뿐만 아니라, '경영판단 추정 원칙'을 기반으로 주주총회나 이사회 결의 등 필요한 절차를 밟았는지, 이사 재량범위 내에서 이루어진 판단인지 등 명확한 기준으로 판단한다. 전경련은 "법원이 경영자의 전문적 판단에 대한 사법적 심사를 자제하는 것으로, 한국 법원이 개별사안의 내용을 세세하게 심사하고 미래 위험성까지 판단하는 것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고 해석했다.
연구를 맡은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법원이 경영일선의 모든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데, 전문 경영인이 내린 고도의 전문적 판단 내용까지 법원이 문제 삼는 것은 지나치다"며 "경영판단의 원칙에 대한 적용 기준을 법에 명시하고 법원은 미국처럼 절차적인 하자 여부에 중점을 두어 사법적 판결을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