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부산역에서 차로 40여분 거리에 있는 녹산국가산업단지. 원전 부품 생산업체 은광산업의 이종열 대표는 이날 직원들에게 구조조정 소식을 전하고 왔다고 했다. 이 대표는 "직원 두 명을 오늘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며 "있는 거 없는 거 다 팔고 자본금까지 까먹으면서 지금까지 왔지만 이제는 견디기조차 힘들다"고 말했다. 그의 사무실 벽 한 켠엔 첨단기술기업 지정서와 기술혁신형·경영혁신형 중소기업 확인서 등 한때 촉망받는 중소기업이었던 흔적이 걸려있었다.
은광산업은 두산에너빌리티(034020)(옛 두산중공업) 협력업체로 1990년대부터 원전 핵심 부품을 가공해 납품해왔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원전업의 앞날은 밝았다. 설계수명을 늘린 신형 원전 모델이 나왔고, 기존 원전 수명 연장도 추진돼 관련 부품 수요도 함께 늘었다. 수출도 탄력을 받았다.
그러나 탈원전 정책 이후 일감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 대표는 "한때 250억원이 넘었던 연 매출은 지금 120억원도 채 안 되는데, 이것도 온갖 일을 다해 겨우 만든 것"이라며 "기업 매출이 기존 수준에서 70% 이하로만 내려가도 이윤이 안나오고 맛이 간다"고 말했다.
은광산업은 그나마 선박 기자재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해 연명했지만, 원전 부품 외길만 걷던 기업들은 대거 문을 닫았다. 두산에너빌리티 협력업체 원자력 분과장을 맡았던 이 대표는 "당시 우리 분과에 20여개 협력업체가 있었는데, 거의 다 문을 닫고 4개만 남았다"고 말했다. 녹산산단에 위치한 또다른 원전부품업체 D사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원전 부품업은 일감이 뚝 끊겨 2년 전에 결국 정리했다"며 "원전 관련해서는 얘기조차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 매출 줄고 인력 대거 이탈… 기초체력 바닥난 원전 생태계
문재인 정부가 탈원전 정책을 강행한 5년간 원전 생태계는 빠르게 파괴됐다. 한국원자력산업협회에 따르면 국내 원자력 산업 총 매출은 2016년 27조4513억원에서 2020년 22조2436억원으로 19% 감소했다. 특히 민간 기업들이 속해있는 원자력 공급 산업체의 총 매출은 같은 기간 5조5034억원에서 4조573억원으로 26% 급감했다.
인력 규모 역시 축소됐다. 전체 산업 인력은 2016년 3만7232명에서 3만5276명으로 5% 줄었는데, 원자력 공급 산업체 인력은 2만2355명에서 1만9019명으로 15% 쪼그라들었다. 탈원전 정책으로 진로가 불투명해지다보니 원자력 관련 대학 재학생 수도 줄고 있다. 미래 인재 공급도 여의치 않은 셈이다. 영남대는 2018년 기계공학부 내 원자력 연계 전공을 폐지했다.
탈원전 정책이 폐기된다 해도 중소 협력업체까지 활력이 도는 데는 수년이 소요될 전망이다. 원전 하나를 건설하는 데 최소 10년이 걸리고, 기존 원전의 수명을 연장하는 작업도 2년 이상 필요하다. 익명을 요구한 한 원전 부품업체 관계자는 "사람을 찾을 돈이 없고, 새로 투자하려 해도 돈이 없다"며 "꼼짝할 수가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또다른 업체 관계자 역시 "당장 일감이 없어 공장 문을 닫냐 마냐 하는 상황에서 1~2년 뒤를 보고 기다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원전 생태계 회복에 큰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다고 보고 있다. 정범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생태계 복원에 필요한 비용이 증가하는 것은 물론이고, 정책에 대한 신뢰가 떨어져 기업들이 신규 투자를 주저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손양훈 인천대 교수는 "새 정부가 탈원전 정책을 폐기한다 해도 제자리로 돌아가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며 "5년간의 탈원전 정책이 국내 원전 생태계를 굉장히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 "살아남은 업체들엔 자금 지원 기준 대폭 낮춰야"
원전 중소기업들은 당장 자금 지원책이 시급하다는 입장이다. 특히 지금까지 살아남은 기업에 대해선 지원 기준의 문턱을 대폭 낮춰야 한다고 했다. 기업의 수익성과 재무 건전성을 따지는 현 기준을 따른다면 이미 벼랑 끝에 몰린 원전 중소기업들은 모두 지원 대상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원자력산업협회 조사에서도 중소기업 육성을 위해 필요한 사항으로 ▲연구개발비 지원(65.5%) ▲제품 또는 기술용역 공급계약시 특례조치(19.7%) ▲기술담보에 의한 금융지원(9.0%·이상 중복응답) 등 경제적 지원 관련 응답이 상위권을 차지했다.
신규 원전 건설과 기존 원전의 수명 연장 등을 하루빨리 추진해 일감을 늘리는 작업도 필요하다. 신규 원전을 짓기 위해 첫 삽을 뜨는 데까지 수년이 소요되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지만, 매출 기대감 높여 업계의 활력을 가져올 수 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역시 원전 계속운전 신청 시기를 설계수명 만료일로부터 2~5년 전에서 5~10년 전으로 앞당기겠다고 했다. 이 경우 윤석열 정부 임기 내에 수명 연장을 신청할 수 있는 원전은 총 18기에 이른다. 현 제도 하에서는 총 10기다. 손 교수는 "각 원전의 계속운전(수명연장) 여부 결정을 서두른다면, 부품 업체들은 다소 숨통이 트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