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엔화에 대한 원화 가격이 최근 3년여 사이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지만, 과거와 달리 국내 수출기업 등 산업계에 미치는 영향이 제한적일 것이란 분석이 나오고 있다. 엔화 가치가 떨어지는 엔저(低)는 일본 수출기업의 가격 경쟁력을 높여 통상 일본과 경쟁하는 한국 수출기업엔 악재로 작용한다.
그러나 최근 전 세계적으로 원자재 가격이 급등해 일본 기업도 엔화 가치가 하락한 만큼 제품 가격을 내리기 어려운 데다, 한국과 일본의 수출 주력품목이 차별화되면서 엔저 현상이 이전과 같은 큰 부담으로 이어지긴 어렵다는 분석이 나온다. 일본에서 원재료·부품을 수입하는 일부 기업은 오히려 수익성이 좋아지는 효과가 있다.
31일 서울외국환중개에 따르면 지난 30일 100엔당 원화값은 장중 982.42원을 기록하며 2018년 12월 이후 최저치로 내려갔다. 안전자산으로 꼽히는 엔화는 전쟁이나 자연재해 등 위기 상황에서 통상 가치가 상승하지만, 최근엔 미국 등 주요국이 기준금리를 올리는 반면 일본은행은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고수하고 있어 엔화를 팔고 떠나는 자금이 늘었고, 그 결과 엔화 가치가 하락하고 있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엔저 현상이 나타나면 국내 산업계는 크게 긴장했다. 2015년 상반기 100엔당 원화값이 800원대까지 떨어졌었는데, 당시 한국경제연구원은 1~4월간 한국의 13대 수출 품목 중 석유화학·석유제품·가전·철강·평판디스플레이 등 9개 품목의 수출 증감율이 두 자릿수 마이너스를 기록했다는 분석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기업들은 직접 경쟁 제품의 가격을 인하하고 원가절감·기술개발에 나서는 한편 구조조정을 단행하기도 했다.
지금의 엔저는 과거와 비교해 부담이 크지 않다는 것이 국내 산업계의 반응이다. 먼저 원화도 약세를 보이고 있어 국내 기업의 가격 경쟁력이 유지될 수 있다. 1달러당 원화값은 30일 기준 1209.10원으로 1100원대를 보이던 연초 대비 높아진 상황이다. 지난 15일엔 1245.50까지 오르며 최근 1년간 최고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엔화를 비롯한 환율변동이 수출에 미치는 영향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정혜선 한국무역협회 수석연구원은 "세계 주요 수입국의 경기회복 속도에 따른 수요, 품질경쟁력 등 가격 이외의 요인들이 수출에 미치는 영향이 커지면서 과거에 비해 환율변동 영향이 줄어드는 추세"라고 말했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각종 원재료 가격이 급등하면서 일본 기업들이 엔저 혜택을 고스란히 누리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조의윤 한국무역협회 수석연구원은 "일본도 원자재 대부분을 수입해야 하는 상황이라 가격 상승 부담이 만만치 않아 엔저라고 해서 일본 기업이 마냥 유리하다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보통의 경우라면 엔화 가치가 떨어진 만큼 일본 기업이 제품 가격을 낮춰 세계 시장 점유율을 높였겠지만, 지금처럼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시기엔 가격 인하가 어렵다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수출 주력품목의 차별화가 진행됐다는 점도 엔저의 힘을 빼는 요인이다. 2015년 엔저 당시 큰 타격을 받았던 석유화학은 일본과의 경쟁을 크게 신경쓰지 않고 있다. 한국과 달리 일본은 범용 석유화학의 경우 내수용으로만 생산하고, 첨단소재 위주로 수출하기 때문이다.
김평중 한국석유화학협회 본부장은 "에틸렌 생산능력 기준은 한국이 4위, 일본이 5위를 기록하고 있다"며 "일본은 석유화학 설비가 노후화됐고 구조조정도 단행해 규모가 작다"고 말했다. 이외 전기기기와 기계, 자동차는 10년 전보다 수출 경합도가 낮아졌고, 반도체의 경우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 일본은 시스템 반도체에 주력해 경쟁보다는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가깝다.
엔저로 국내 일부 산업계가 수혜를 입을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원재료, 부품의 일본 의존도가 높은 업종은 엔저에 따른 원가 절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석유화학의 경우 2월 기준 전체 수입액이 23억달러로 집계됐는데, 이중 25%인 5억8500달러가 일본산이었다. 조선, 일반기계 업종 역시 핵심 부품의 일본 의존도가 높다. 일부 배터리 기업은 분리막 원단을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다.
엔저 현상이 장기화될 경우 일부 업종은 피해를 입을 수 있다. 원재료 가격 급등으로 고전하고 있는 것은 국내 기업도 마찬가지인 데다, 여전히 세계 시장에서 일본과 경합하는 품목이 다수이기 때문이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2020년 기준 한국이 1위, 일본이 2위를 차지하고 있는 품목은 총 16개로 나타났다. 철강·비철금속 분야 7개, 화학제품 6개, 광산물과 고무 등이다. 그중에서도 양국 점유율 차이가 5%포인트(P) 내에 불과한 품목은 7개로 집계됐다. 일본의 가격 경쟁력이 높아지면 한국 제품은 상대적으로 피해를 보게 된다.
정 수석연구원은 "일본 기업들이 엔저 상황에서 수출단가를 얼마나 인하할 것인지가 실제 시장에서는 중요하게 작용한다"며 "일본 기업들이 수출단가 인하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나서는지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