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조선 시황 회복에 힘입어 국내 중형조선사들이 최근 5년 가운데 가장 많은 일감을 확보한 것으로 조사됐다. 하지만 은행이 지급 보증을 서주는 RG(선수금 환급 보증) 발급 한도가 차면서 당장 올해부터 추가 수주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중형조선사들은 더 많은 선박을 수주할 수 있도록 RG 발급 한도를 늘려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5일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에 따르면 HJ중공업(097230)(옛 한진중공업)과 케이조선(옛 STX조선), 대선조선 등 국내 중형조선소의 지난해 선박 수주량은 총 136만CGT(표준선 환산톤수)로 집계됐다. 2020년보다 234.7% 증가한 수준이다. 같은 기간 수주액은 전년 대비 351.4% 증가한 29억9000만달러(약 3조6200억원)로 추산된다. 지난해 말 기준 수주 잔량은 2020년보다 83.5% 늘어난 175만CGT를 기록했다. 중형조선사들이 2016년 이후 가장 많은 일감을 확보했다는 의미다.
양종서 해외경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조선 시황 호전과 함께 중형조선사들이 새 주인 찾기에 성공하면서 경영체제 정비를 마치고 활발한 수주 활동을 전개한 덕분"이라며 "금융위기 이후 지속적으로 위축돼온 국내 중형조선사들이 경쟁력을 정비해 산업 활동을 증가시킬 수 있는 희망적인 신호"라고 분석했다.
올해도 조선시장이 호황을 보이고 있지만, 정작 중형조선사들은 공격적인 수주가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RG 발급 한도가 거의 다 차면서 선박을 추가로 수주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RG는 조선사가 선박을 제때 건조하지 못하거나 파산할 경우, 은행이 선주에게 선수금을 대신 물어주는 지급보증을 말한다. 통상 RG 발급이 선행돼야 선주는 조선사에 대금을 지급하고, 조선사는 이 돈으로 배를 짓는다. RG 발급 없이는 수주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국내 중형조선사의 RG 발급 한도는 대형조선사의 10분의 1 수준인 3억~5억달러(약 3600억~6000억원) 수준으로 알려졌는데, 지난해 중형조선사들이 선박을 대거 수주하면서 RG 발급 한도의 80~90%가 소진됐다. 올해 선박 2~3척만 더 수주해도 RG 발급 한도가 초과하는 업체도 있다. 한 중형조선사 관계자는 "업황이 좋을 때 선박을 최대한 많이 수주해야 불황에도 버틸 수 있는데 지금은 RG에 발목이 잡혀 여력이 돼도 수주를 해야할지 고민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중형조선사들은 금융사들에 RG 발급 한도 증액을 요구하고 있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고 있다고 주장했다. 은행에서 RG 발급 한도 증액의 조건으로 새로운 담보를 요구하고 있는데, 이미 기존 RG에 대한 담보로 조선소 부지까지 제공하고 있어 추가로 제공할 자산이 없다는 것이다. 금융사들은 RG를 발급해줬던 중소형조선사들이 연쇄 도산해 수천억원의 손실을 봤던 만큼 RG 발급 한도를 늘리는 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RG 발급이 제한되면 중국 등 해외 업체에 일감을 뺏길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중국에서는 국영 조선그룹 중국선박공업(CSSC) 산하의 금융 계열사가 계약 대금을 지원해주고 있어, 국적 선사들마저 RG 발급 걱정이 없는 중국에 선박을 발주한 사례가 있다.
중형조선사들은 글로벌 조선시황이 회복세를 보이고 있는 만큼, 국책은행이 나서서 RG 발급 한도를 늘려줘야 한다는 입장이다. 조선업계 고위 관계자는 "국책은행이라면 대승적 차원에서 국내 조선산업을 키울 수 있는 방향으로 금융 지원에 나서야 한다"며 "RG 발급 한도 증액 없이는 연간 수주 목표도 달성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정부가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정부는 지난해 9월 'K-조선 재도약 전략'을 발표하면서 '중소조선사의 RG 특례보증 활성화를 추진'하겠다고 밝혔으나 현장에서 체감할 만큼의 변화는 없었다고 한다. 익명을 요구한 조선업계 교수는 "조선업이 사이클 산업인 만큼 호황기에는 정부가 나서서 뒷받침을 해줘야 한다"며 "차기 정부에서는 보다 적극적인 산업정책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