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전기 기반의 사회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남는 전기를 흘려보내지 않고 대량으로 저장할 수 있다면 전기는 어디에나 풍부하게 존재할 것이고, 모든 사람이 마음껏 전기를 쓸 수 있겠죠. 추위와 더위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보다 의미있고 가치 있는 일에 시간을 투입할 수 있을 겁니다. 바나듐(vanadium) 이온 배터리가 널리 보급되면 모두에게 에너지가 평등한 세상이 가능합니다."

대용량 배터리인 에너지저장장치(ESS)를 개발하는 스탠다드에너지의 김부기 대표는 조선비즈와의 인터뷰에서 "바나듐 이온 배터리는 ESS에 가장 특화된 기술"이라며 "이 기술을 하나의 산업으로 키워 인류의 에너지 사용에 기여하는 것이 우리의 최종 목표"라고 말했다.

카이스트 출신 김 대표와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연구진이 2013년에 설립한 스탠다드에너지는 최근 배터리 업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스타트업이다. 롯데케미칼(011170)은 지난달 650억원을 들여 스탠다드에너지 지분 15%를 인수해 2대 주주로 올라섰다. 한국조선해양은 차세대 전기추진선 개발을 위해 스탠다드에너지와 손을 잡았다. 이 외에도 국내 여러 대기업들이 스탠다드에너지와 협업을 논의 중이다.

김부기 스탠다드에너지 대표가 조선비즈와의 인터뷰에서 바나듐 이온 배터리를 소개했다. 바나듐 이온 배터리는 전해액(양극과 음극 사이를 이동하는 이온의 흐름을 높여주는 물질)이 물로 돼 있어 화재 위험이 없다. 배터리 겉면으로 종이를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이같은 높은 안전성 때문이다. /박상훈 기자

◇ "바나듐 배터리, ESS 시장 주도할 것… 2년 후 GWh 규모 생산능력 확보"

현재 전세계 ESS 시장은 리튬 이온 배터리가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작고 가벼운데다 저장한 전기의 90%가량을 쓸 수 있다는 장점 덕분이다. 다만 휘발성이 높은 물질을 전해액(양극과 음극 사이를 이동하는 이온의 흐름을 높여주는 물질)으로 사용해 화재 위험이 높다. 한국 ESS 시장이 침체된 것도 리튬 이온 배터리에서 잇달아 발생한 화재 때문이다.

스탠다드에너지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바나듐 이온 배터리는 전해액의 주성분이 물이라 불이 붙을 위험이 없다. 배터리 효율성 역시 96%로 리튬 이온 배터리보다 높다. 크기는 리튬 이온 배터리보다 다소 크지만 ESS로 사용하기엔 무리가 없는 수준이다. 리튬 이온 배터리 역시 물 성분의 전해액을 사용하려 시도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성공하지 못했다. 물을 쓰면 안전성을 확보할 순 있지만 그로 인한 성능 저하, 수명 단축 등의 기술적 이슈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리튬이온 배터리는 높은 에너지 밀도에 초점을 맞춰 기술 발전이 이뤄진 반면, 바나듐 배터리는 안전성을 최우선으로 개발됐다는 차이도 있다.

한국조선해양이 스탠다드에너지의 바나듐 이온 배터리를 선택한 것도 이 때문이다. 김 대표는 "선박 화재는 해양 오염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물론 인명, 재산 피해 규모가 커질 수 있어 치명적"이라며 "기존 리튬 이온 배터리로 만든 전기 선박은 화재 사례가 있었고, 이 때문에 조선사들은 높은 안전성에 효율성까지 갖춘 배터리를 원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두 회사는 바나듐 이온 배터리를 선박에 적용하기 위한 인증 절차를 밟기 위해 협의 중이며 내년 상반기까지 전기추진선·전력운송선의 기본 설계를 완료한다는 계획이다.

김 대표는 ESS의 주도권은 결국 바나듐 이온 배터리가 갖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바나듐 이온 배터리는 배터리 수명이 끝난 뒤에도 소재 재활용이 가능해 공급 부족에 대한 우려가 적은 것은 물론 환경도 챙길 수 있다"며 "리튬이온 배터리 대비 제조 공정에 투입되는 시간이 10분의 1 수준으로 적어 에너지 절약이 가능하고, 그만큼 적은 투자로 많은 양을 생산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리튬 이온 배터리 화재로 침체된 한국 ESS 시장을 생각하면 마음이 급하다고 했다. 그는 "탄소중립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ESS는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기술이 됐고, 지금은 국내 ESS 시장이 침체기에 빠져있지만 해외 시장의 성장을 보면 언제까지나 방치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어 "빠른 시일 내에 생산량을 확보해 시장에 필요로 하는 만큼 공급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고 덧붙였다.

스탠다드에너지는 올해 중 10메가와트시(MWh) 규모까지 생산능력이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김 대표는 "2년 후 국내외를 합해 기가와트시(GWh·1MWh의 1000배) 규모의 생산능력을 확보할 것"이라고 말했다. 해외 진출을 위해선 최근 2대주주로 올라선 롯데케미칼의 인프라를 적극 활용한다는 방침이다. 현재 90명 규모인 조직도 커질 전망이다. 스탠다드에너지는 ESS를 구축해 사후관리까지 전담하는 ESS 시스템 통합(SI) 사업을 준비해왔고, 앞으로 마케팅과 재무 등에 대한 투자도 이어간다는 계획이다.

김부기 스탠다드에너지 대표는 바나듐 이온 배터리를 단순 기술에서 '산업'으로 키우고 싶다는 포부를 보였다. 투자를 유치하는 기준도 이와 연결된다. 함께 하는 투자자는 경영에 간섭하는 불편한 존재가 아닌, 산업을 키우는 우군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약 2년간 협업을 이어온 롯데케미칼의 지분 투자 역시 이같은 시각에서 결정됐다./박상훈 기자

◇ 17세 카이스트 입학한 로봇 수재, 배터리로 전향

김 대표는 과학고를 조기졸업하고 만 17세에 카이스트에 입학, 25세에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7세에 카이스트 연구 조교수로 일하다 28세때 스탠다드에너지를 창업했다. 당초 로봇 개발자를 꿈꾸며 카이스트에 진학했고, 2004년에 동아리 팀원들과 함께 지능형 모형 자동차 설계 경진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할 만큼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다 로봇의 성능을 올리기 위해선 배터리가 개선돼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진로를 바꿨다. 기술 발전 속도가 다소 느리지만, 그만큼 과제가 많다는 데서 도전의식을 느꼈다고 했다.

현재까지 성장하는 과정은 험난했다. 2013년 창업 이후 이미 존재하던 기술인 '바나듐 레독스 흐름전지'에 4년 이상을 매달렸다가 바나듐 이온 배터리로 방향을 바꿨다. 김 대표는 "공학도 입장에서 수년간의 시간을 쏟아부었던 만큼 전환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팀원들과 비즈니스를 한다는 마음으로 돌아섰다"며 "그만둬야 하나라는 생각을 수없이 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견뎌냈다는 데 큰 가치를 부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스탠다드에너지는 꼬박 8년을 들여 지난해 바나듐 이온 배터리를 시장에 출시했다. 안전성 검증에만 100만 시간을 들였다.

김 대표는 아직도 2004년 대회 우승 영상을 돌려본다고 했다. 그는 "당시 저희 팀은 로봇을 만들어본 경험이 적었고, 우승을 위해선 기존의 방식으로는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결국 우리가 처음으로 시도한 방식을 통해 2등과 압도적 차이로 우승했고, 20년이 다 돼가는 지금도 그 방식이 로봇계에서 쓰이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새로우면서도 깊이 있는 것이 진정한 혁신이고, 그 혁신의 생명주기가 얼마나 오래 가는지를 알게 됐다. 바나듐 이온 배터리라는, 아무도 걷지 않는 길을 닦아나가고 있는 지금 그 경험이 가장 큰 원동력이 됐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