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가 대한항공(003490)아시아나항공(020560) 합병을 승인했다. 미국과 유럽 등 해외 경쟁 당국의 승인이 이뤄진다면 에어프랑스와 루프트한자 등 글로벌 대형 항공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메가 캐리어(Mega Carrier·초대형 항공사)'가 탄생하게 된다. 다만 공정위는 독과점 우려가 있다며 통합항공사에 대해 향후 10년 동안 일부 노선에 대해 슬롯(공항당국이 항공사에 배정한 항공기 출발·도착시각)과 운수권(특정 국가에 취항하기 위해 필요한 권리)에 제한을 두기로 결정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은 이번 조치에 따라 자칫 통합 항공사의 사업 경쟁력이 약화될까 우려하고 있다.

22일 항공업계에 따르면 공정위는 이날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결합을 승인하는 대신, 기업결합일로부터 10년 동안 경쟁 제한성이 우려되는 국제선 26개, 국내선 14개 노선에 대해 운수권과 슬롯 반납 등의 '구조적 조치'와, 운임 인상·공급량 축소 제한 등의 '행태적 조치'를 내리기로 결정했다. 이는 두 항공사가 취항하고 있는 국제선 65개 가운데 49%, 국내선 22개 중 64%에 달한다.

지난 2월 8일 인천공항 화물터미널에 대한항공 항공기가 서있다./뉴스1

공정위 조치가 실제로 적용될 경우, 통합항공사는 신규 진입을 원하는 다른 항공사에 운수권 일부를 넘겨야 한다. 예를 들어 서울~프랑스 파리 노선의 경우 비행기를 하루 4회 띄울 수 있는 권리를 2회로 줄이고 나머지 2회를 다른 국내 항공사에 넘기는 식이다. 여기에 국내외 공항 슬롯 이전과 운임 결합 협약, 공동 운항 협약 체결 등에도 적극 나서야 한다. 공정위는 이같은 구조적 조치를 이행하기 전까지 통합항공사의 운임 인상과 공급량, 서비스 질 축소도 제한할 방침이다.

항공업계는 이같은 공정위 조치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통합으로 기대됐던 시너지 효과를 저해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우기홍 대한항공 사장은 앞서 작년 3월 코로나19가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전제로 연간 3000억~4000억원의 시너지 효과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한 바 있다. 중복 노선 효율화와 연결편 강화에 따른 수익 제고 및 규모의 경제 실현으로 원가 절감이 이뤄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운수권과 슬롯을 제한하면 규모의 경제 실현이 어려워진다.

공정위가 설치한 이행감독위원회의 감시도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항공업계 관계자는 "항공산업은 외생변수에 크게 영향을 받기 때문에 시의적절한 대응이 필요하다"며 "그런데 10년간 이행감독위원회로부터 감독을 받을 경우 항공사의 경영자율성이 악화되고 통합 시너지 효과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중복 인력도 문제다. 현재 대한항공 임직원 수는 1만8000명, 아시아나항공은 8700명이다. 업계에선 두 회사의 통합으로 업무가 중복되는 간접 인력만 1000명이 넘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슬롯과 운수권 제한으로 통합항공사의 영업 활동 범위가 줄면 중복 인력은 유휴 인력으로 분류될 수 있다.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이 산업은행과 인위적인 구조조정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장기적으로 고용 유지가 기업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계약직 근로자의 계약을 연장하지 않거나 승무원의 근무시간을 줄이고 신규 채용을 중단할 가능성이 크다.

일각에선 공정위 제재 수위가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낮다는 평가도 나온다. 통합 승인 후 10년 동안만 슬롯과 운수권에 제한을 두기로 했기 때문이다. 10년 간 통합항공사의 노선에 진입을 원하는 항공사가 나타나지 않으면 사실상 독점 운용도 가능하다는 뜻이다. 여기에 '알짜 노선'으로 꼽히는 김포공항발(發) 국제선도 제재 대상에서 빠졌다. 김포공항은 도심과 가까워 항공권이 비싸도 탑승률이 높기 때문에 국내 저비용항공사(LCC)들이 취항을 원했던 노선이다. 공정위는 해당 노선에 대해 경쟁 제한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업계 관계자는 "엄연히 김포공항과 인천공항의 시장 가치가 다른데도, 공정위가 두 공항을 하나로 합쳐서 경쟁 제한성을 판단한 건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지난 2월 21일 인천공항 주기장에 세워진 티웨이항공과 아시아나항공 여객기들. /연합뉴스

제주항공(089590)티웨이항공(091810), 에어프레미아 등 LCC들은 이번 공정위 조치의 수혜를 일부 보게될 전망이다. 항공사만 취항을 원한다면 북미 노선의 경우 여객 수요가 높은 시간대 슬롯을, 유럽·중국·동남아 노선은 통합항공사가 보유하고 있던 운수권을 이전받을 수 있다. 특히 공정위가 시정 명령을 내린 노선 대부분은 수익성인 높은 알짜 노선으로 평가받는다.

업계에서는 LCC가 북미·유럽 등 장거리 노선에 취항하기 보다는 중국, 동남아 등 중단거리 노선에 집중하는 전력을 펼칠 것으로 내다봤다. 제주항공과 티웨이항공이 장거리 노선 취항을 염두에 두고 대형기 도입을 검토하고 있지만,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다가 자칫 유동성 위기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오랜 적자로 재무 사정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사업 모델을 전환하는 데 한계가 있을 것"이라며 "기존 주력 노선이었던 중단거리 노선 공급을 늘리는 방식으로 경쟁력을 키울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국내 항공산업이 발전하기 위해선 정부가 해외 국가들과의 회담을 통해 신규 노선을 늘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올해 1월 국토교통부는 스위스와 항공 운수권을 확대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황용식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이제는 정부에서 기업에 제한만 둘 게 아니라 '파이(노선)'를 키워 국내 항공산업 전체가 발전할 수 있는 방향을 적극 검토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