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중공업그룹이 대우조선해양 인수 절차를 공식 중단한 가운데, 재계에서는 오히려 현대가(家) 3세 정기선 현대중공업지주 사장의 승계 작업에 힘이 실릴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최대 6조원으로 예상됐던 인수 자금을 정 사장이 추진하는 수소, 자율운항, 로봇 등 신사업에 투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 사장 입장에선 신사업에서의 성과를 통해 그룹 내 입지를 다질 수 있는 기회가 생긴 셈이다.

정기선(오른쪽) 현대중공업지주 사장이 이달 5일(현지시간) 'CES 2022' 현대중공업그룹 부스를 찾은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에게 아비커스를 설명하고 있다./연합뉴스

현대중공업그룹은 최근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출한 기업결합 신고를 자진 철회했다. 유럽연합(EU)에서 기업 결합을 승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대중공업그룹은 산업은행과 인수 계약을 맺으면서 해외 경쟁당국 6곳 중 1곳이라도 승인을 하지 않으면 인수를 철회하기로 돼 있다고 설명했다. EU의 결정문을 검토 해 항소에 나설 가능성이 있지만, 승소할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룹 관계자는 “만약 승소할 경우 공정위에 기업 결합 심사를 다시 요청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EU의 결정에 현대중공업그룹이 불복하는 모양새지만, 정기선 사장의 승계작업에는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는 게 업계 설명이다. 우선 대우조선해양 인수 과정에서 지배 구조 재편을 완료했다. 현대중공업그룹은 2019년에 옛 현대중공업에서 투자부문을 떼어내 조선부문 중간지주사인 한국조선해양을 설립했다. 지주사인 현대중공업지주 아래 한국조선해양을 두고, 다시 그 아래 현대중공업·현대삼호중공업·현대미포조선 등 조선사를 두는 구조다. 대우조선해양도 당초 한국조선해양의 자회사로 편입될 예정이었다.

대우조선해양의 인수가 무산됐으나, 2019년 물적 분할 당시 인수가 불발돼도 회사 분할은 유효하다는 단서를 달아두었기 때문에 지금의 중간 지주사 체제는 그대로 유지된다. 정기선 사장 입장에선 지배구조 정점에 있는 현대중공업지주 지분만 보유해도 한국조선해양과 조선 3사를 동시에 지배할 수 있게 됐다. 현재 정기선 사장은 현대중공업지주 지분 5.26%를 보유해 26.6%를 보유한 아버지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에 이어 개인 2대 주주로 있다.

현대중공업그룹이 2019년 현대중공업 물적 분할 과정에서 계획했던 대우조선해양 인수 구조. /조선DB

대우조선해양 인수가 무산돼 현대중공업그룹에는 상당한 여유 자금이 생겼다. 당초 현대중공업그룹은 1조5000억원을 투입해 산업은행이 보유한 대우조선해양 지분 55.7%를 인수하고, 인수 후에도 필요할 경우 최대 1조원을 추가로 지원할 계획이었다. 여기에 대우조선해양이 보유한 2조3000억원에 달하는 전환사채(CB), 산업은행이 보유할 1조2500억원 규모의 상환전환우선주까지 현대중공업그룹이 부담할 인수자금은 최대 6조원까지 늘어날 수 있었다. 이는 지난해 대우조선해양의 연간 매출 전망치인 4조3650억원보다도 많은 액수다.

현대중공업그룹은 여유 자금을 신사업에 투자할 전망이다. 정기선 사장은 올해 그룹 창립 이후 처음으로 세계 최대 전자·IT 전시회인 미국 CES에 참석해 ▲액화수소 운반 및 추진시스템 기술 ▲자율운항기술 ▲지능형 로보틱스 및 솔루션 등을 3대 핵심사업으로 제시했다. 모두 정 사장이 추진하는 신사업이다. 정 사장은 CES에서 “조선사를 넘어 퓨쳐빌더(Future Builder·미래 건설자)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재계 관계자는 “정 사장 입장에선 신사업 성과를 바탕으로 경영 능력을 입증해야 한다”며 “인수 불발로 굳힌 여유 자금을 신기술 투자 및 연구개발(R&D) 인력 확대에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중공업그룹은 올해 하반기로 예정된 경기도 판교 GRC(글로벌 R&D 센터) 입주를 계기로 매출액 대비 기술개발 투자 비중을 6~7%까지 끌어올리고, R&D 인력도 대거 확보할 계획이다.

정기선 현대중공업지주 대표가 지난 1월 5일 미국 라스베이거스 'CES 2022' 현장에서 그룹의 미래 비전을 발표하고 있다. /현대중공업그룹 제공

통상임금 패소에 따른 재무 부담도 덜 수 있게 됐다. 법원은 현대중공업 근로자들이 낸 임금 소송 상고심에서 사측의 손을 들어준 원심을 깨고 작년 12월에 사건을 2심으로 돌려보낸 바 있다. 조선업계는 판결에 따라 지급해야 할 통상임금 소급분 규모를 7000억원 안팎으로 추산하고 있는데, 현대중공업은 지급 규모에 맞춰 충당 부채를 설정할 방침이다.

신용평가사들도 대우조선해양 인수 무산으로 현대중공업그룹이 받을 타격은 미미하다며 오히려 ‘재무 부담 리스크’가 해소됐다고 평가했다. 한국신용평가는 “대우조선해양 인수가 무산될 경우 현대중공업그룹의 재무 부담이 사라져 신용도에 긍정적”이라고 했다. 나이스신용평가도 “현대중공업그룹에서 지금까지 대우조선해양 인수와 관련해 실제 자금 지출이 발생하지는 않았다”며 “인수 무산으로 잠재적 재무 부담이 소멸할 전망”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