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수력원자력이 “2050 탄소중립 달성을 위해선 원전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연이어 내놓고 있다. 원전 폐쇄를 앞당기기 위해 경제성 조작까지 했다는 혐의를 받을 정도로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앞장섰던 한수원이 입장을 180도 바꾼 배경에 대해 관심이 쏠린다. 탈원전 정책의 허구성을 지적하는 ‘소신 발언’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반면, 대선을 앞두고 탈원전 재고 필요성이 거론되자 잘못을 덮기 위한 면피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수원은 지난 4일 국민의힘 김도읍 의원 측에 ‘원전은 안전하지 않다’, ‘우리나라는 원전을 가동하면서 값싼 발전단가를 최고로 여겼고 국민의 생명과 안전은 후순위였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원전이 친환경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등의 주장에 대한 반박을 8페이지 분량으로 제출했다.

한수원은 “원전 운영에 있어서 최우선의 핵심가치는 언제나 안전”이라며 “국내에서 원전이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운영되면서 값싸고 안정적인 전력공급에 기여한 바가 커서 안정성, 경제성 등이 부각됐지만 한 차례의 사고도 없이 운영되었던 것은 원전 안전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원전의 친환경성도 강조했다. 한수원은 최근 유럽연합(EU)이 원전 투자사업을 ‘녹색분류체계(EU택소노미)’에 포함한 점을 언급하며 “2050 탄소중립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원전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했다.

정재훈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이 지난해 10월 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의 원자력안전위원회 등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답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최근 한수원은 친원전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12월 한수원은 환경부에 “원전은 탄소배출이 매우 적은 초저탄소 전원”이라며 “원전은 탄소중립과 국가온실가스 감축목표(NDC) 상향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재생에너지의 한계를 완화해주는 현실적 대안”이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보다 두 달 전인 10월엔 정재훈 한수원 사장이 국회 국정감사에서 “신한울 3·4호기 건설이 재개됐으면 좋겠다는 개인적 바람을 가지고 있다”, “(원전 없이 탄소중립 달성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등의 발언을 했다.

이는 그간 한수원의 입장과는 전면 배치되는 것이다. 2018년 4월 취임한 정 사장은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발맞춰 월성1호기를 조기폐쇄하기 위해 경제성을 조작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상태다. 한수원은 원자력에 힘을 빼고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실제 2018년엔 정부가 추진하는 새만금 재생에너지단지 사업에서 수상 태양광 주관 사업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한수원이 탈원전에서 친원전으로 돌아선 데 대해 일각에서는 문 정부의 탈원전 정책 실패를 인정하는 소신 발언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정 사장이 관료 출신인 만큼 취임 초기엔 정부에 발을 맞출 수밖에 없었지만, 직접 경영한 결과 원전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월성 1호기 폐쇄 등 위법적 탈원전 정책에서 책임을 면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신한울 3·4호기 건설만 해도 이미 약 7900억원이 투입된 만큼 공사가 최종 중단된다면 피해를 본 기업들이 한수원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가능성이 있다. 원자력 업계 관계자는 “월성 1호기의 경우 이미 폐쇄 과정에서 위법성이 드러난 데다, 정권이 바뀌기라도 한다면 탈원전 정책 추진 과정의 문제와 책임을 더욱 강하게 물을 것”이라며 “이를 대비한 움직임일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