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사들이 ‘한국의 실리콘밸리’라 불리는 경기도 성남시 판교에 연달아 연구·개발(R&D) 센터를 입주시키고 있다. 글로벌 조선업계 트렌드가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자율운항 선박 등 기술중심 산업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젊고 유능한 R&D 인력들이 수도권에 몰려있고, 이들이 조선소가 있는 지방보다 수도권 근무를 선호하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

5일 조선업계에 따르면 현대중공업그룹은 판교에 ‘GRC’라 불리는 글로벌 R&D 센터를 짓고 있다. 지상 19층에 연면적 16만5300㎡(약 5만평) 규모의 GRC는 올해 하반기 준공될 예정이다. 현대중공업그룹에 속한 7개 계열사의 R&D 인력 5000여명이 이곳에서 근무하게 된다. 현대중공업그룹은 GRC 입주를 계기로 매출액 대비 기술개발 투자 비중을 6~7%까지 끌어올리고 스마트십, 스마트야드, 정보통신기술(ICT) 기반 서비스 등을 연구하겠다는 계획이다.

올해 하반기 준공 예정인 현대중공업그룹의 글로벌 R&D 센터 전경. /현대중공업그룹 제공

삼성중공업(010140)은 현대중공업그룹에 앞서 2014년 판교 테크노밸리에 R&D 센터를 짓고 본사를 판교로 이전했다. 삼성중공업 판교 R&D 센터는 지하 5층, 지상 8층에 연면적 5만7460㎡(약 1만7400평) 규모로 현재 삼성중공업의 연구인력 500여명이 근무하고 있다. 삼성중공업에 따르면 최근 판교 R&D 센터에선 암모니아 연료공급 시스템, 액화천연가스(LNG) 밸류체인, 액화수소 추진선박 등의 친환경 에너지 연구가 중점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두 조선사는 우수한 R&D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판교에 입주했다고 설명했다. 권오갑 현대중공업그룹 회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GRC 입주 이후 가장 총력을 기울일 부분은 연구 및 개발 인력 확보”라고 강조했다. 서울과 가까운 판교에는 카카오(035720)와 같은 IT회사뿐 아니라 투자회사, ICT기업 등이 모여있어 R&D 인력 풀(pool)을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SK가스(018670), LIG넥스원(079550), 한화테크윈 등 ‘굴뚝기업’들도 일찍이 판교에 입주한 이유다.

젊은 구직자들이 수도권 근무를 선호하고 있는 점도 조선사들이 판교에 자리를 잡은 이유다. 재계 관계자는 “최근 젊은 R&D 인력은 구직 조건으로 회사의 위치와 출퇴근 거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추세“라며 “신규 인재 영입뿐 아니라 기존 R&D 인력을 다른 기업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수도권에 연구센터를 마련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대우조선해양 시흥 R&D센터에 조성된 대형시험수조 시설. /대우조선해양 제공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R&D 인력을 한 곳으로 모으는 효과도 있다. 현대중공업그룹의 경우 현대일렉트릭, 현대로보틱스 등 그룹 계열사 R&D 인력들이 용인과 분당에 흩어져 있는데, 향후 이들을 GRC에 입주시키겠다는 계획이다. 삼성중공업도 과거에는 R&D 인력이 조선소가 있는 경남 거제와 서울 서초사옥에 분리돼 있었지만, 판교 R&D 센터 개소로 한 곳에 모이게 됐다고 한다. 기업 입장에선 R&D 인력이 한데 모이면 업무 효율화를 높일 수 있다.

대우조선해양은 판교에서 직선거리로 33㎞ 떨어진 경기도 서울대 시흥 캠퍼스에 R&D 센터를 열었다. 5만㎡(1만5000평) 규모의 R&D 센터에는 대우조선해양 연구원 150여명이 근무하고 있다. 260m 길이의 대형 수조를 갖추고 있어 각종 선박 관련 실험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게 특징이다. 현재 대우조선해양은 서울대와 산학협력을 맺고 자율운항 선박 기술 등을 개발하고 있다.

조선업계가 R&D에 신경을 쏟는 이유는 과거처럼 원가를 줄여 승부를 보는 시대가 아니라 탄소 배출 절감, 스마트십, 자율운항 등 시장을 선도하는 신기술이 수주 활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중국과 동남아가 값싼 인건비로 추격해 오고 있어 한국 조선사들의 가격 경쟁력은 뒤처진 상태”라며 “독자적인 신기술을 확보해야 업황 부침에 상관없이 안정적으로 수익을 유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