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창립 50주년을 맞은 현대중공업그룹이 정기선 사장을 중심으로 한 3세 경영을 본격화한다. 지난해 10월 부사장에서 승진한 정기선 사장은 그룹 지주사인 현대중공업지주뿐 아니라 조선 부문 지주사 한국조선해양의 대표이사까지 맡게 됐다. 정기선 사장은 올해 노사 관계 개선, 대우조선해양 인수 등 당면한 현안에 집중하며 3세 체제의 연착륙에 힘을 쏟을 전망이다.

1982년생인 정기선 사장은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손자이자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의 장남이다. 대일외고,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으며 육군 ROTC(43기)로 군복무를 마쳤다. 육군 중위 전역 후 2007년 동아일보 기자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현대중공업그룹에 합류한 것은 2009년으로 당시 재무팀 대리로 입사했다가 미국 유학,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을 거쳐 2013년 현대중공업그룹에 경영기획팀 수석 부장으로 재입사했다. 이후 재무부서, 경영지원실 등 그룹 내 핵심 부서를 거치며 경영 수업을 받아왔다.

그래픽=이은현

정 사장은 재입사 후 현대중공업의 수주 활동에 힘을 보탰다. 2015년 기획실 총괄부문장을 맡았을 당시, 사우디 국영석유회사인 아람코와 전략적 협력관계를 구축하는 양해각서(MOU) 체결을 주도했다. 아람코의 고위 관계자들이 현대중공업을 방문했을 때 정 사장이 직접 안내를 맡았다. 당시 아민 알 나세르 아람코 사장은 정 사장을 두고 "사우디에서 사업 기회를 포착하는 예리함은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일가의 DNA"라고 평가했다.

정 사장이 가장 최근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난해 9월 킨텍스에서 열린 '코리아 H2 비즈니스서밋'이다. 당시 정 사장은 정의선 현대차(005380) 회장, 신동빈 롯데 회장, 조현상 효성(004800) 부회장 등에게 현대중공업그룹이 추진 중인 수소 생태계 디오라마(축소 모형물)를 직접 소개했다. 그는 당시 현장에서 "그룹 계열사의 인프라를 토대로 국내 기업과 시너지를 발휘해 수소경제 활성화에 최선을 다하겠다"며 수소 생태계 구축을 위한 의지를 밝혔다.

현대중공업그룹 내부에서 정 사장은 '젊은 리더십'으로 통한다. 정 사장이 직접 구상해 만든 일명 '미래위원회'가 대표적이다. 미래위원회는 현대중공업그룹 각 계열사의 30대 대리·과장급 젊은 직원들로 구성된 조직으로 인공지능(AI), 수소에너지, 바이오 등 신사업 발굴을 논의하는 조직체다. 정 사장이 미래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신사업 발굴을 진두지휘했다. 그룹 내부에선 정 사장이 상명하복의 수직적인 전통 제조업 문화에서 탈피해 수평적인 조직을 구성했다는 점에서 이전 세대 오너와 차별점을 두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2015년 사우디아라비아 아람코 본사에서 정기선 당시 현대중공업 전무가 알 나세르 아람코 사장과 양사 협력관계를 위한 MOU에 서명하고 있다. /현대중공업 제공

올해는 정 사장의 리더십이 본격적으로 평가를 받는 해가 될 전망이다. 사장으로 승진해 지주사와 한국조선해양의 대표이사를 맡게 된 만큼, 경영 수업을 받는 게 아닌 실제 경영을 해야할 시기라는 것이다. 우선 노사 관계 개선이 시급하다. 아직 지난해 임금협상을 끝내지 못했는데, 현대중공업 노조에 강성 집행부가 들어서 험난한 교섭이 예상된다. 정병천 신임 노조위원장은 2019년 물적분할(법인분할) 당시 임시 주주총회장 점거 등을 이끈 인물로 꼽힌다. 현 노조 집행부가 파업권을 갖고 있어 대규모 파업이 현실화될 경우 선박 건조 일정에 차질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3년 넘게 지연되고 있는 대우조선해양과의 인수합병 문제도 남아있다. 총 6개 국가의 경쟁 당국에서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중국, 카자흐스탄, 싱가포르에서만 기업결합이 승인됐고 EU, 한국, 일본 등 3개국에선 아직 승인이 나지 않았다. EU는 독과점을 문제 삼아 액화천연가스(LNG)선 사업 일부 매각 등을 요구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LNG선은 현대중공업의 대표 '효자 선종'이어서 LNG 사업 매각은 곧 경쟁력 악화를 의미한다.

재계 관계자는 "젊은 총수가 그룹의 현안을 어떻게 해결하는지에 따라 앞으로의 업무 수행 동력이 좌우될 것"이라며 "승계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2019년 현대중공업 노조원들이 물적분할에 반대하며 울산시 동구 한마음회관 건물을 점거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 사장이 실질적으로 그룹 경영권을 장악하려면 지분 확보도 필요하다. 현재 그룹 지주사인 현대중공업지주의 대주주는 지분 26.6%를 보유한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이다. 정 사장의 지분은 5.26%다. 정 이사장이 보유한 지분 가치는 1조2000억원으로 추산되는데, 정 사장이 이를 증여받거나 상속받으려면 수천억원의 세금을 내야 한다. 급여와 배당금 외 마땅한 수익처가 없는 정 사장 입장에선 지분 매각을 통해 현금을 확보할 것으로 전망된다. 오일선 한국CXO연구소장은 "과거 사례를 보면 통상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보유 지분의 30%를 매각해 증여·상속세의 재원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