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대우조선해양의 '가상현실(VR) 도장 교육센터'에서는 VR 고글을 착용한 근로자들이 분주하게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들은 실제 선박 블록 형상을 그대로 옮겨 놓은 가상공간 속에서 도장 페인트를 고압 스프레이로 분사하는 훈련을 체험 중이었다. 머리에 착용한 VR 고글과 헤드셋, 손에 쥔 분사기를 통해 시각·청각·촉각 효과를 동시에 느낄 수 있어 몰입감 있는 훈련이 가능하다. 대우조선해양 관계자는 "도장 업무에 숙달하기까지 통상 수년이 걸린다"며 "VR 교육을 통해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반복적으로 훈련을 한다면, 이 기간을 크게 단축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허무는 VR 기술이 게임을 넘어 산업 현장에도 빠르게 도입되고 있다. 정비, 용접, 도장 등의 직무 교육부터 안전 교육까지 VR 기반의 교육 프로그램을 활용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 특히 크고 작은 설비가 쉼 없이 가동하는 제조업 현장에서 물리적 부상 위험이 없는 VR 교육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VR 교육의 가장 큰 장점은 다양한 실전 상황을 가상 공간에 얼마든지 구현할 수 있다는 점이다. 최근 한국항공우주(047810)(KAI)는 가상 공간에서 한국형 전투기 KF-21, 일명 보라매를 정비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을 활용하면 값비싼 실제 항공기를 고장 내지 않고도 가상 공간에서 실제와 같은 정비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메타버스와 연계할 경우 전국 각지의 정비사들이 가상 공간에 동시에 모여 협업 정비도 할 수 있다. KAI 관계자는 "실전과 같은 훈련을 반복적으로 수행해 정비사의 역량을 최대치로 끌어올릴 수 있다"며 "군용기뿐 아니라 민항기 정비에도 적용할 수 있어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고 말했다.
3~4년에 한 번씩 공장 가동을 멈추고 노후 설비를 교체하는 석유화학 공장에서도 VR 교육을 활용한다. SK이노베이션(096770)은 지난달 주력 생산 기지인 울산콤플렉스(울산CLX)에 VR을 활용한 검사 교육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기존에는 공장을 가동하지 않는 정기 보수 기간에만 검사·진단 고도화 작업을 할 수 있어 초급 검사자는 정기 보수 전에 설비 검사 능력을 기르기 어려웠다. 하지만 VR 교육 프로그램을 도입함으로써 가상공간에서 상시 훈련이 가능해 정기 보수 기간이 아니더라도 언제든지 설비 검사 능력을 기를 수 있게 됐다.
VR을 활용해 직무 교육을 받을 경우 일반 강의실에서 직무 교육을 받는 것보다 4배 더 효율적이란 조사 결과도 있다. 글로벌 회계 컨설팅 기업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가 올해 6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일반 강의실에서 2시간이 걸리는 직무 교육을 VR 교육으로 대체했더니 실험 참가자들이 30분 만에 교육을 마쳤다. 집중도 역시 온라인 강의보다 4배가량 높았으며 직무 수행에 대한 자신감은 275%까지 상승했다.
물리적 부상 위험 없이 교육할 수 있다는 점도 VR 교육의 장점으로 꼽힌다. 쌍용C&E는 국내 시멘트업계 최초로 가상현실 안전 체험 시스템을 도입해 운용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안전교육은 과거의 사고 사례를 분석한 영상 자료를 시청하는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안전에 대한 경각심은 물론이고 상황 발생 시 신속한 대처 능력을 높이는 데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VR 교육을 통해 끼임, 추락, 전도, 화재 등 다양한 안전사고 상황을 작업자가 가상 공간에서 직접 체험함으로써 안전의식을 높일 수 있다는 게 쌍용 측 설명이다.
재계 관계자는 "중대재해가 발생하기 쉬운 산업 현장에선 근로자들의 적극적인 안전 교육 참여가 중요하다"며 "VR 등 새로운 기술을 활용할 경우 근로자들의 참여율과 집중도가 높아져 사고 발생 빈도도 낮아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