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의 한 노무법인 김모 대표는 중소기업 사장들로부터 중대재해처벌법 관련 전화를 수시로 받는다. 법 시행이 2달도 안 남았지만, 대부분이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대표가 처벌받는다는 내용 정도만 알고 있다고 한다. 무엇을 대비해야 할지 막막해 정부의 세부 지침만 기다리는 사장들도 있다. 정부가 지난 29일 폐기물 처리업, 창고 및 운수업 등 고위험 업종 2곳의 ‘업종별 안전보건 관리체계 자율점검표’를 배포했지만, 다른 업종에도 이 같은 지침이 나와야 한다는 게 김 대표의 설명이다. 그는 “중소기업 현장에서 중대재해처벌법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수준이라, 혼란을 막으려면 정부가 업종에 특화된 지침을 빨리 내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인명 사고가 발생했을 때 사업주·경영책임자의 처벌을 강화한 중대재해처벌법이 내년 1월 27일부터 시행되지만, 중견·중소기업은 속만 끓이고 있다. 법령이 모호할뿐더러 경영 여건상 인력 충원이나 설비 자동화에 나서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혼란을 막기 위해 법 시행 유예 대상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29일 오전 강원 속초시 교동의 한 건물 신축공사장에서 대형 크레인이 옆으로 기울어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주변 건물 외벽 일부가 부서지고 주차돼 있던 차량 2대가 부서졌으나 다행히도 인명피해는 없었다. /연합뉴스

중소기업중앙회와 한국경영자총협회가 50인 이상 기업 314개사를 대상으로 진행한 ‘중대재해처벌법 이행준비 및 애로사항 기업 실태조사’에서도 중견·중소기업의 고민이 나타났다. 조사 결과 응답기업의 66.5%가 중대재해처벌법 준수가 어렵다고 했는데, 그 이유로 ‘의무내용이 불명확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47.1%)’를 가장 많이 꼽았다.

고용노동부가 지난 17일 A4용지 200여쪽 분량의 ‘중대재해처벌법 해설서’를 배포했지만 그 역시 이해하기 어렵다고 한다. 경영책임자 등이 세워야 하는 안전·보건 목표와 경영방침이 대표적이다. 해설서는 이 경영방침을 ‘항상 고려해야 하는 안전보건에 관한 기본적인 경영철학과 의사결정의 일반적인 지침을 담고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뒷장에선 ‘(경영방침은)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내용에 그쳐서는 안 되고, 사업 또는 사업장의 특성, 유해·위험요인, 규모 등을 고려한 실현 가능한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박양균 중견기업연합회 정책본부장은 “해설서가 나왔지만 현장에선 안전·보건 관련 예산을 어떻게 편성해야 할지 등을 두고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 안전·보건 전담조직 만들어야 하는데… “결국 비용이 문제”

중견·중소기업들은 현실적으로 비용 부담도 크다고 토로한다. 최근 A 중견 조선사는 안전관리를 담당할 직원 3명을 채용했다. 중대재해처벌법상 상시 근로자 수가 500명 이상인 기업은 안전·보건 업무를 총괄·관리하는 전담 조직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추가로 6명을 더 고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해설서에 따르면 안전·보건 전담 조직의 구성원은 ‘2명 이상’이면 되지만, 안전·보건 관리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지원하는 등의 역할까지 수행해야 한다. 전담 조직의 구성이나 규모가 ‘형식적 수준에 그쳐서는 안된다’는 단서도 있다. A사 관계자는 “결국 비용이 부담”이라며 “인력을 늘릴 수 있도록 경영 상황이 좋아질 것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설비 자동화도 기대하기 어렵다.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물류비와 원자재비가 뛰면서 비용 부담이 커졌기 때문이다. 경기 북부의 중소 가구제조사 대표 B씨는 “목재 가격이 크게 올라 원자재 비용을 대기도 벅찬 상황에서 설비 교체는 꿈도 못 꾼다”며 “사고 한번이면 회사 문을 닫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탓에 그저 직원들에게 ‘조심하자’고 당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포스코 직원이 '찾아가는 안전버스'를 통해 용역사 안전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포스코 제공

중견·중소기업 등에 하청을 주는 대기업들도 발등의 불이 떨어졌다. 중대재해처벌법상 원청이 제3자에게 도급, 용역, 위탁 등을 한 경우 수급인과 수급인의 종사자에 대해서도 안전·보건 확보 의무를 이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포스코(POSCO)는 이달부터 ‘찾아가는 안전버스’를 운영해 용역사 직원들의 안전교육을 강화했고,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 등은 협력사의 안전 체계를 평가·관리하고 나섰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중소 협력사들은 중대재해처벌법 관련 대책을 세울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아 따로 강의해주기도 한다”며 “하지만 하청에 재하청까지 모두 원청의 책임 범위라고 하는데 어디까지 감당해야 할지 막막하다”라고 말했다.

◇ 중견·중기업계 “중대재해처벌법 유예기간·지원 대책 마련해야”

중견·중소기업 현장에선 혼란이 여전하지만,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면 당장 처벌은 대폭 강화된다. 중대재해처벌법은 1명 이상의 산재 사망자가 발생하면 사업주 또는 경영책임자 등을 1년 이상의 징역 또는 10억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돼 있다. 징역형의 ‘하한선’만 있다. 사망 사고와 관련해 산업안전보건법(7년 이하의 징역)이나 형법(업무상 과실치사 5년 이하의 금고) 등이 ‘상한선’을 둔 것보다 처벌 수위가 세다. 이에 한 중견기업 대표는 중대재해처벌법을 두고 “매일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기분으로 살아야 한다”고 평가했다.

실효성에는 물음표가 따라붙는다. 중대재해처벌법이 국회를 통과한 올해 산재 사망자는 오히려 늘었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에 따르면 올해 들어 9월까지 50인 이상 사업장에서 559명이 사고나 질병으로 숨졌다. 지난해 동기(605명)보다 8.2% 많다. 경제단체 관계자는 “코로나로 움츠러들었던 산업 현장이 다시 정상화됐기 때문”이라며 “사고를 예방할 수 있도록 투자 등이 뒷받침돼야 하는데 ‘기업인 처벌’만 있으니 효과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중견·중소기업 등이 대책을 세울 수 있도록 유예 대상을 확대하고, 자금 지원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현재 중대재해처벌법은 개인사업주, 상시 근로자 50명 미만 사업·사업장, 건설 공사금액 50억원 미만에 대해서만 공포 후 3년이 지난 2024년 1월 27일부터 시행하게 돼 있다.

이태희 중기중앙회 스마트일자리본부장은 “코로나 사태로 힘들어진 기업에 중대재해처벌법을 대비할 수 있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며 “의무를 부과하고 지키지 못하면 처벌하는 방식보다 산업안전보건 설비를 개선할 수 있도록 정부가 지원책을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