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요소수 품귀 사태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정부가 민간 기업에도 도움을 요청했다. 정부는 지난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마스크 품귀 현상이 나타났을 때도 민간 기업을 통해 마스크 필터 원료인 부직포를 공수해왔고, 백신 조기 확보에도 기업의 도움을 받았다. 재계 안팎에선 "위기 때마다 기업이 사태 수습을 맡는 모양새"란 지적이 나온다.
10일 재계에 따르면 정부는 요소수 대란에 대응하기 위한 태스크포스(TF)를 발족하기 하루 전인 지난 4일 기업 관계자 등 10여명을 불러 해결 방안에 관한 의견을 청취했다. 이 자리에는 요소 트레이딩(무역) 사업을 진행해본 포스코인터내셔널(047050), 삼성물산(028260) 등 종합상사가 포함됐다. 업계 관계자는 "이번 요소수 대란과 관련해 조언을 구하기 위한 자리였고, 요소수를 구해달라는 요청은 없었다"고 말했다.
재계에선 문재인 대통령까지 나서서 요소수 확보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밝힌 상황에서 정부 회의 참석만으로도 기업들이 압박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한 민간 기업의 대관 관계자는 "정부가 공개적인 자리에서 직접적으로 요소수를 구해오라고 요청은 안 했겠지만, 무언의 압박이 있었을 것"이라며 "기업의 사회적 책임도 중요하지만, 국가연구개발(R&D) 예산이라도 받으려면 정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게 민간 기업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실제 종합상사들은 이미 요소수 확보에 착수한 것으로 파악됐다. 포스코인터내셔널은 해외 지사와 거래처 등을 통해 현재 다각도로 요소수 수입처를 물색하고 있다. 삼성물산도 요소수 확보와 관련해 내부 현황 파악에 나선 상황이다. 정부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던 LX인터내셔널(001120)도 자체적으로 해외 네트워크를 활용해 요소수 생산과 유통업체 관련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해외 국가들 대부분 요소수를 내수용으로만 사용하다 보니 충분한 물량을 확보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민간 항공사들도 예외는 아니다. 최근 정부는 해외에서 요소수를 수입해올 국가가 확정될 경우를 대비해 대한항공(003490)과 아시아나항공(020560)에 화물기 운용 상황을 문의했다. 항공사들은 현재 블랙프라이데이와 크리스마스 등 물류업계 최대 성수기를 맞아 화물기를 100% 가동하고 있어 정부 요청이 들어오면 기존 일정을 조정할 수밖에 없다. 정부는 수입처가 결정되면 항공사들과 협상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업계에선 선박으로 수송할 경우 시간이 오래 걸리는 만큼 결국 민간 항공사의 화물기 투입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정부는 과거에도 위기 때마다 민간 기업에 도움을 요청했다. 지난해 코로나19 1차 유행 당시 마스크 품귀 현상이 발생하자, 정부는 삼성에 도움을 요청해 마스크 필터용 부직포(MB·멜트 블로운)를 신속하게 들여왔다. 삼성이 부직포를 구매 대행하는 방식으로 통상 6개월 이상 걸리는 수입 절차를 1개월 이내로 단축한 것이다. 당시 삼성이 확보한 부직포 53톤(t)은 마스크 2500만장을 생산할 수 있는 분량이었다. 마스크 필터 생산업체인 도레이첨단소재에도 총리가 직접 방문해 증산을 부탁하기도 했다. 당시 도레이첨단소재는 기저귀용 소재 생산라인까지 개조한 끝에 필터 생산량을 기존 1t에서 13t으로 늘렸다.
코로나19 환자 급증으로 치료센터가 부족했을 때는 삼성, SK(034730), LG(003550) 등 주요 그룹들이 그룹 연수원을 제공했다. 백신 늑장 도입으로 논란이 됐던 지난해 말에는 삼성이 직접 화이자 고위 관계자들과 접촉해 3분기부터 공급될 예정이던 백신을 올해 3월로 앞당길 수 있도록 힘을 보탰다. 재계 관계자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 기업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면서도 "정권 초기 대기업을 적폐 취급했던 점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