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조선업계 호황으로 신조선가가 12년 만에 최고치를 경신했다. 오랫동안 국내 조선사들 실적의 발목을 잡아 왔던 저가 수주 관행에서 탈피하고 있다는 반응이 나온다. 조선사들은 높아진 선박 가격을 바탕으로 실적 개선에 속도를 내겠다는 계획이다.

3일 영국의 조선·해운 시황 분석기관인 클락슨리서치에 따르면 지난달 말 기준 신조선가지수는 152.28포인트로 집계됐다. 올해 1월 127.11포인트와 비교하면 약 20% 오른 수준이다. 신조선가지수는 1998년 전 세계 선박 건조 가격 평균을 100으로 기준 잡아 지수화한 것으로, 높을수록 선가가 많이 올랐다는 의미다. 신조선가 지수가 150포인트를 넘은 것은 조선 호황기였던 2009년 7월 이후 12년 만이다.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한국조선해양 제공

선박 종류별로 살펴보면 벌크선의 신조선가지수는 올해 1월 126.45포인트에서 10월 말 160.13포인트로 27% 상승했다. 같은 기간 가스 운반선은 134.99포인트에서 15% 오른 155.67포인트, 원유 운반선은 146.88포인트에서 22% 오른 179.45포인트, 컨테이너선은 76.37포인트에서 25% 오른 95.96포인트로 집계됐다.

신조선가가 올해 고공행진 하는 이유는 복합적이다. 우선 국제해사기구(IMO) 환경 규제 강화와 해운 운임 상승 여파로 선박 발주 수요가 대거 늘었다. 클락슨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1~9월 세계 선박 발주는 총 3754만CGT(표준화물선 환산톤수)로 지난해 1~9월 1332만CGT에 비해 184% 증가했다. 극심한 불황기를 겪었던 2016년 1~9월과 비교하면 257% 증가한 수준이다.

한국조선해양, 삼성중공업(010140), 대우조선해양 등 국내 대형 조선사들은 연초부터 연달아 선박을 수주하면서 현재 2~3년 치 일감을 확보한 상태다. 안정적인 일감을 확보한 만큼, 수익성이 담보되는 일감만 선택적으로 수주할 수 있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지금은 수주 목표를 초과 달성하면서 조선사들이 가격 협상력을 쥐게 됐고 오히려 배를 골라서 주문받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삼성중공업이 건조한 LNG운반선. /삼성중공업 제공

원자재 가격 상승도 신조선가를 끌어 올리는 주요 원인이다. 선박 건조 비용의 20%에 달하는 후판(두께 6㎜ 이상의 두꺼운 철판) 가격이 치솟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업계와 철강업계는 매년 반기마다 후판 가격을 협상하는데, 철강사들은 올해 상반기와 하반기 두 차례에 걸쳐 후판 가격을 톤(t)당 60만원에서 100만원으로 약 66% 인상한 것으로 전해졌다. 국내 후판 가격이 톤당 100만원을 넘어선 건 2011년 이후 처음이다. 조선사들은 높아진 가격 협상력을 바탕으로 후판 가격 상승분을 선가에 반영하는 추세다.

조선업계는 선박 가격이 대폭 오르면서 장기간 이어져 온 저가 수주 관행에서 벗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국내 조선사들은 2000년대 초반 조선업계 슈퍼사이클(초호황) 당시 앞다퉈 설비 증설에 나섰으나,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발주가 끊기자 저가 수주에 나섰다. 이때 출혈 경쟁에 따른 수익 악화를 견디지 못한 성동조선, STX조선해양 등은 법정 관리를 받는 신세로 전락했다. 특히 저가 수주는 원청뿐 아니라 중소 하청, 기자재 업체들까지 연쇄 타격을 줘 국내 조선산업을 휘청이게 했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당시 국내 조선소들뿐만 아니라 중국 조선사들과도 경쟁하느라 도크는 채워도 수익이 나지 않는 악순환이 이어졌다”며 “다행히 업황이 회복하면서 지금은 원하는 가격에 선박을 주문받을 수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조선업계는 신조선가가 고공행진을 지속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란 반응이다. 선가가 너무 높으면 오히려 발주가 취소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 올해 8월 아랍에미리트(UAE) 국영 석유공사 애드녹의 해운 자회사 애드녹 엘엔에스는 선가가 너무 올라 5척의 액화천연가스(LNG)선 신조 입찰을 연기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