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중공업그룹은 최근 사내 벤처 키우기에 한창이다. 지난해 12월 현대중공업지주가 60억원을 출자해 설립한 사내 벤처 '아비커스(Avikus)'가 주인공이다. 아비커스는 바이킹의 어원인 '아비커(avviker)'에서 따온 이름으로 인공지능(AI) 기반의 자율운항 선박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다. 올해 6월 국내 최초로 선박 자율운항 시연회에서 12인승 소형 선박의 자율운항에 성공했다. 아비커스는 조만간 세계 최초로 자율 운항 기술을 통한 대형상선의 대양 횡단에 나설 계획이다. 현대중공업은 신사업 육성을 가속하기 위해 올해 7월 아비커스의 유상증자에 80억원을 추가로 출자하는 등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현대중공업그룹의 자율운항 전문 사내 벤처 아비커스가 지난해 6월 16일 경북 포항운하 일원에서 '선박 자율운항 시연회'를 개최했다. /현대중공업그룹 제공

조선, 화학, 정유 등 전통 굴뚝 기업들이 벤처 투자에 빠졌다. 자율운항 선박, 친환경 섬유 등 신기술·신소재를 선제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투자다. 사내 벤처 육성뿐 아니라 외부 벤처 기업 지분 투자도 적극 나서고 있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확산에 따라 일반 벤처를 넘어 소셜 벤처에 투자하는 대기업도 등장했다.

13일 재계에 따르면 한화시스템(272210)은 올해 4월 사내 벤처 프로그램인 '프런티어'를 통해 초소형 위성용 시스템, 도심항공교통(UAM)용 에어택시 서비스 플랫폼, 인공지능(AI) 상황인식 시스템 개발을 맡을 3개 벤처팀을 출범시켰다. 한화시스템은 내년까지 1억원의 사업자금 지원을 포함해 별도 사무실 운영비, 사업 컨설팅 등을 지원한다. 한화시스템 관계자는 "지원이 끝나면 사업화 가능 여부를 심사해 스핀오프(분사 창업)도 가능하다"며 "향후 이들의 기술, 전문인력, 고유자원 등을 연계한 미래 성장 동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업들이 자체 연구개발(R&D)팀이 아닌 사내 벤처를 통해 신기술 육성에 나서는 이유는 '전문성' 때문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산업 환경 속에서 기업이 모든 영역을 연구·개발할 수 없는 만큼 전문 인력만으로 구성된 사내 벤처가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별개의 독립된 조직으로서 경영진의 입김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점도 장점으로 꼽힌다. 현대중공업그룹 관계자는 "아비커스의 경우 내로라하는 자율운항 관련 전문 인력으로 구성된 게 특징"이라며 "덕분에 선박 자율운항 시스템의 고도화와 전문성을 집중적으로 진행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화시스템이 '초소형 위성용 시스템' 개발을 맡을 벤처팀장으로 1990년생 대리급인 하헌우 선임연구원을 선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낮은 연차임에도 전문성과 사업성을 보고 벤처팀장으로 선발했다는 게 한화시스템의 설명이다.

한화시스템의 사내 벤처 프로그램 '프런티어'를 통해 선발된 벤처팀장들. 한화시스템은 이들에게 1년간 1억원의 사업자금, 별도 사무실 운영비, 사업 컨설팅을 지원할 계획이다. 왼쪽부터 박장한 수석연구원, 하헌우 선임연구원, 김의정 수석연구원. /한화시스템 제공

신기술 개발을 위해 지분 투자 방식으로 외부 벤처 기업과 손을 잡는 굴뚝 기업도 있다. 지난 달 방산업체 한국항공우주(KAI)산업은 드론 이미지 분석 벤처 기업 메이사의 지분 20%를 인수했다. 메이사는 드론 촬영 이미지 데이터 가공을 주로 하는 기업이다. 향후 자체 개발한 이미지 분석 엔진을 활용해 위성 이미지 분석에도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 KAI가 제작한 초소형 위성을 기반으로 위성 이미지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기후, 안보, 국토관리 등 고부가가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위성 이미지 시장은 오는 2030년 70억달러(약 8조원) 규모로 성장할 전망이다.

정유사 에스오일도 신소재 확보를 위한 벤처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지난해 고성능 아스팔트 생산용 유황개질제 기술을 보유한 벤처기업 범준이엔씨에 지분을 투자했다. 범준이엔씨는 정유공장 부산물인 유황을 원료로 고성능 콘크리트용 수경성 개질유황을 생산하는 벤처기업이다. 에스오일은 지분투자를 통해 비료·살충제 제조에 주로 사용되는 유황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동시에 고성능 콘크리트 및 아스팔트 등 수요처를 확대하는 효과도 기대하고 있다. 에스오일은 기존 사업과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벤처 투자를 이어나갈 계획이다.

B2B(기업 간 거래) 중심의 굴뚝 기업이 소비자와의 접점을 늘리기 위해 벤처 기업과 협업 체계를 구축하는 사례도 있다. 섬유 기업인 효성티앤씨(298020)는 올해 6월 친환경 패션 벤처 기업 '플리츠마마'에 지분 투자를 단행했다. 플리츠마마는 친환경 섬유소재를 사용해 자투리 원단 등 쓰레기가 발생하지 않는 제작방법으로 의류와 소품을 제작하고 있다. 효성티앤씨는 버려진 페트병으로 개발한 친환경 섬유 '리젠(regen®)'을 플리츠마마에 공급함으로써 최종 소비자와 시장의 피드백을 향후 섬유 및 원단 제품 개발에 반영할 계획이다.

의류업체 플리츠마마가 효성티앤씨가 폐페트병으로 만든 친환경 섬유를 활용해 만든 옷. /플리츠마마 제공

SK이노베이션(096770)은 사회적 기업 성장 지원 프로젝트인 'SV² 임팩트 파트너링 모델'을 수년째 시행하고 있다. 전기자동차 배터리 분리막으로 옷을 만드는 사회적 기업 '라잇루트'는 지난해부터 SK이노베이션에서 성장 지원금과 멘토링 프로그램을 지원받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의 소재 자회사인 SK아이이테크놀로지(361610)로부터 직접 폐배터리 분리막을 공급받는 등의 협업 모델도 구축했다. 재계 관계자는 "ESG 경영 추세에 발맞춰 소셜벤처에 투자하는 임팩트 투자도 늘어나는 추세"라며 "수익 창출과 함께 환경(E), 사회(S) 부문의 가치를 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