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생 현대가(家) 3세들이 그룹 안팎에서 신사업 진출과 벤처 투자를 통해 각자의 길을 걷고 있다. 경영권 승계 과정에 있는 정기선(39) 현대중공업 부사장은 그룹의 미래 먹거리를 발굴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고, 정남이(38) 아산나눔재단 상임이사는 의료 스타트업의 사외이사로 선임되며 창업 생태계 조성에 힘을 보태고 있다. 그동안 소셜 벤처에 투자해왔던 정경선(35) 실반그룹 대표는 사모펀드(PEF)를 설립했다.

20일 재계에 따르면 현대중공업그룹의 투자전문 자회사 현대미래파트너스는 지난 7월 총 238억5600만원을 투자해 모바일 건강관리 서비스 회사 '메디플러스솔루션' 지분 76.76% 인수했다. 메디플러스솔루션은 '세컨드윈드' '세컨드닥터' '두핏' 등의 애플리케이션(앱)을 통해 암과 만성질환 환자들에게 건강관리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이다. 현대중공업그룹 관계자는 "신사업 투자의 일환"이라면서 "그룹 차원에서 메디플러스솔루션을 통해 어떤 사업을 꾸려나갈지는 아직 정해진 게 없다"라고 말했다.

(왼쪽부터) 정기선 현대중공업그룹 부사장, 정남이 아산나눔재단 상임이사, 정경선 실반그룹 대표. /조선DB

이번 메디플러스솔루션 인수 과정에서는 정기선 부사장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전해졌다. 정 부사장은 현대중공업그룹의 미래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그동안 인공지능(AI), 수소에너지, 바이오 등 신사업 발굴을 진두지휘해왔다. 미래위원회는 미래 먹거리를 찾기 위해 그룹 각 계열사에서 파견된 30대 젊은 직원들을 중심으로 작년 9월부터 올해 3월까지 운영됐던 일종의 '태스크포스(TF)'였다. 정 부사장은 그룹 컨트롤타워인 경영지원실장도 맡고 있어 미래위원회에서 나온 아이디어를 실제 사업으로 추진하는 데도 힘을 보탰다고 한다.

재계에선 정 부사장이 신사업에서의 성과를 바탕으로 승계 작업을 본격화할 것으로 내다봤다. 당초 작년 말 그룹 안팎에선 정 부사장이 사장으로 승진할 것이란 관측이 나왔으나, 조선업 불황과 대우조선해양 인수 지연으로 연말 인사 명단에 오르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아산사회복지재단에서 운영 중인 서울아산병원이 방대한 의료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는 만큼, 이를 바탕으로 디지털 헬스케어 사업을 강화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2019년 카카오(035720)와 함께 설립한 의료 데이터 전문기업 '아산카카오메디컬데이터'와의 시너지도 가능하다. 정 부사장은 의료 사업 외에도 스마트선박‧자율운항 기술 개발에도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정기선 부사장의 여동생인 정남이 아산나눔재단 상임이사는 벤처 투자 업계에서 보폭을 넓히고 있다. 지난 10일엔 의료 AI 스타트업 '루닛'의 사외이사로 선임됐다. 2013년 설립된 루닛은 국내 최초 딥러닝 기반 의료 인공지능 기업으로 암 진단과 치료를 위한 AI 솔루션을 개발하는 회사다. 백승욱 루닛 이사회 의장은 "정남이 이사는 아산나눔재단에서 스타트업 생태계 조성에 크게 기여하는 등 전문성을 갖춘 인물"이라며 앞으로 루닛에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관련 경영 전략을 수립하는 역할을 맡을 것이라고 밝혔다. 루닛의 백 의장은 과거에도 아산나눔재단의 각종 행사에서 강연 활동을 하면서 정 이사와 인연을 이어온 것으로 전해졌다.

재계에 따르면 정 이사가 벤처 투자 업계에 뜻을 두기 시작한 것은 아산나눔재단에 합류한 2013년부터였다. 아산나눔재단은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서거 10주기를 맞아 당시 정몽준 아산사회복지재단 이사장 등이 약 6000억원을 출연해 설립한 비영리재단이다. 출범 이후 창업 지원 사업에 주력해왔다. 컨설팅회사 베인앤컴퍼니에서 일해왔던 정 이사는 아산나눔재단에 합류한 이듬해인 2014년 창업지원센터 '마루180'을 설립했다. 명함관리 서비스 '리멤버', AI 번역 플랫폼 '플리토', 맛집 추천 서비스 ' 망고플레이트' 등이 마루180을 거쳐 갔다. 정 이사는 2019년 마루180 개관 5주년 기념행사에서 "(누구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이룰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게 목표"라며 스타트업 육성에 대한 의지를 밝힌 바 있다.

정기선 부사장, 정남이 이사와 사촌지간인 정경선 실반그룹 공동대표도 벤처 투자 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정 대표는 정몽윤 현대해상(001450) 회장의 아들이다. 그는 대학 졸업 직후인 2011년 아산나눔재단에서 1년간 인턴 생활을 하고 이듬해 소셜 벤처를 지원하는 비영리법인 루트임팩트를 설립했다. 2014년엔 소셜임팩트 전문 투자사 HGI를 세워 소셜 벤처들의 성장을 지원하는 투자를 집행해왔다. 최근엔 싱가포르에 임팩트, 지속가능성, ESG(환경·사회·지배구조) 투자를 테마로 한 사모펀드(PEF) 운용사 '실반캐피탈매니지먼트'를 설립했다. 재계 관계자는 "현대가의 보수적인 가풍 속에서도 해외 유학과 공익재단 인턴, 컨설팅회사 근무 경험을 바탕으로 전 세대에 비해 과감하고 도전적인 투자에 나서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