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억(원) 삭감합시다. 이것은 지적이 맞는 것 같아요. 다음."

문재인 정부가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실현하기 위해 수소환원제철 등 신기술을 활용하겠다고 밝혔으나, 2012년 국내 철강업계가 수소환원제철 기술 개발에 착수할 수 있었던 기회는 이 세 마디 말로 무산됐다. 업계에서는 수소환원제철 기술개발이 늦어지면서 2050 탄소중립에는 이 기술이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2012년 철강업계의 탄소 배출 저감을 위해 'CO2 Free 차세대 제철기술 개발사업'에 10억원의 예산을 편성했다. CO2 Free 차세대 제철기술은 당시 수소환원제철 기술을 부르던 용어였다. 수소환원제철은 석탄 대신 수소를 환원제로 사용해 이산화탄소 배출 없이 환원철을 만든 후 철강 제품을 생산하는 방식이다. 미국과 유럽, 일본 등은 이미 기술 개발에 나서 당시 국내에도 원천 기술 확보의 필요성이 제기되던 때다. 그런데 이 사업 예산이 국회에서 전액 삭감되는 데는 1분이 채 걸리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2012년 11월 6일 지식경제위원회 예산결산소위 속기록을 확인한 결과 이날 회의에 CO2 Free 차세대 제철기술 개발사업 에너지특별회계 예산안이 상정됐으나 논의 1분만에 부결됐다. 이 사업은 정부의 예비타당성조사를 통과해 2013년 사업 첫 해 예산으로 10억원이 편성됐다. 이명박 정부는 2013년부터 2020년까지 총 사업비 2800억원 중 1120억원(40%)을 정부 예산으로 지원할 계획이었다.

이날 회의에서 국회 수석전문위원은 이 예산안에 대해 "철강산업 육성 성격의 사업이므로 에너지특별회계 편성이 부적절하다는 지적, 지원 대상 산업이 독과점 구조를 형성하고 있어서 사업 편익이 특정업체에 편중될 수 있다는 지적, 또 수혜기업이 자금 여력과 기술 개발 역량이 충분해 정부 지원 필요성이 낮다는 지적, 이런 지적을 토대로 전액 삭감을 요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앞서 예산정책처는 이 사업이 포스코(POSCO)와 현대제철## 등 대기업 지원에 집중된다는 점을 지적하며 예산 편성에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이에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제2차관은 "철강산업의 CO2 배출량을 획기적으로 감축한다는 차원에서 에너지특별회계에 편성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당시 예산결산소위원장이었던 김동철 민주통합당(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수석전문위원의 지적이 맞다며 "10억(원) 삭감합시다"라고 말한 뒤 의사봉을 두드렸다.

당시 이 기술 개발에는 포스코와 현대제철 외에도 중소기업 33곳이 참여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해당 사업 개발에 참여했던 한 제철업계 관계자는 "수소환원제철 기술은 여러 업체의 종합적인 기술이 필요해 기술력을 갖춘 중소기업들이 대거 참여하기로 했고 예산안에도 이 내용을 반영했다"며 "이런 점을 국회에 계속 설명했지만, 오로지 대기업 특혜에만 포커스가 맞춰졌다"고 했다.

수소환원제철 기술의 원리./포스코 제공

이날 회의에는 여야 의원 10여명이 참석했으나 예산 삭감에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의원은 없었다. 수석전문위원의 발언부터 예산이 삭감되는 데는 1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당시 정부는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은 수소환원제철 기술 개발 비용을 정부 예산으로 전액 지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총 사업비의 40%를 정부 예산으로 편성한 것은 과한 수준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기술력에서 앞선 미국과 일본은 2040년 수소환원제철 기술을 상용화할 계획이다. 이명박 정부 목표도 2040년 상용화였다. 최근 포스코가 수소환원제철 기술을 개발해 10~20년 내에 시제품을 선보이고 2050년에 상용화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2023년 산업 현장에 적용해 2050년 탄소중립을 이루겠다고 밝혔다.

철강 업계는 당시 정부의 지원이 있었다면 세계 최고 기술을 보유한 국내 철강업계가 수소환원제철 기술에서도 글로벌 선두를 차지할 수 있었을 것으로 봤다. 그러나 대기업 특혜라는 지적에 그 후 10년간 제철업계는 기술 개발을 포기했다. 수소환원제철 기술을 적용하면 고로가 필요 없기 때문에 대규모 생산 시설 재편이 필요한데 이에 따른 비용을 민간 기업이 모두 부담하기 쉽지 않다. 철강 업계는 10여년 전 기술 개발에 착수했다면 이런 비용 문제도 민관의 충분한 논의 끝에 합의점을 찾았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당시 기술 개발만 진행됐다면 글로벌 수소환원제철 시장을 국내 철강업계가 주도했을 것으로 자신한다"며 "정부의 산업·환경 정책에 가져다 줄 이득도 막대했고 대규모 신규 일자리 창출도 기대할 수 있는 프로젝트였다. 당시 대선을 앞두고 경제민주화가 화두로 떠오르면서 친환경 기술 개발 사업이 대기업 특혜라며 무산됐다"라고 말했다.